신달자의 ‘국물’
메루치와 다시마와 무와 양파를 달인 국물로 국수를 만듭니다
바다의 스라린 소식과 들판의 뼈저린 대결이 서로 몸 섞으며
사람의 혀를 간질이는 맛을 내고 있습니다
바다는 흐르기만 해서 다리가 없고
들판은 뿌리로 버티다가 허리를 다치기도 하지만
피가 졸고 졸고 애가 잦아지고
서로 뒤틀거나 배배 꼬여 증오의 끝을 다 삭인 뒤에야
고요의 맛에 다가옵니다
내 남편이란 인간도 이 국수를 좋아하다가 죽었지요
바다가 되었다가 들판이 되었다가
들판이다가 바다이다가
다 속은 넓었지만 서로 포개지 못하고
포개지 못하고 절망으로 홀로 입술이 짓물러 눈감았지요
상징적으로 메루치와 양파를 섞어 우려낸 국물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바다만큼 들판만큼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몸을 우리고 마음을 끓여서 겨우 섞어진 국물을 마주보고 마시는
그는 내 생의 국물이고 나는 그의 국물이었습니다.
시집 『살 흐르다』 민음사. 2014. 02. 28.
불가의 인연법이 흥미롭다. 남녀가 하룻밤 만리장성을 쌓는 데 6천 겁, 부부의 연은 8천 겁, 형제자매는 9천 겁, 부모 자식 간은 1만 겁의 연이라 한다. 하지만 가족이란 범주에서 '부부'라는 이름의 특수한 관계로 사는 일이 그리 호락호락하진 않다. 남편의 입장에서든 아내의 입장에서든 마찬가지일 게다. 한쪽이 참으면 가정의 평화가 유지된다고 하는데 자고로 참아가며 살던 시절은 지난 것 같다. 그것은 이혼율 높아진 작금의 세태가 말해준다. 게다가 요즘 젊은이들은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이라 하지 않던가. 어느 시에서처럼 한 사람이 온다는 건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에 그만큼 두려울 수 있다. 결혼의 주체는 자신이다. 그러므로 부부의 문제는 제삼자가 단순하게 판단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일일 수밖에.
제28회 정지용문학상 수상작을 읽는다. ‘사랑을 우려내는 레시피’, 당시 어느 시인의 심사평이 총체적인 미감을 대변해주는 것 같았다. ‘멸치’를 왜 굳이 ‘메루치’라는 사투리를 썼을까? 아마도 토속적이면서 깊은 맛을 내려는 의도로 보인다. 나는 ‘사람의 혀를 간질이는 맛’을 내기 위해 청양고추를 이용한다. 시원하면서도 칼칼한 게 좋다. 바다를 상징하는 멸치와 다시마, 들판을 상징하는 무와 양파의 뼈저린 대결 이면에 드러나지 않은 화자의 부부 갈등이 읽힌다. ‘피가 졸고 졸고 애가 잦아지고/서로 뒤틀거나 배배 꼬여 증오의 끝을 다 삭인 뒤에야/고요의 맛’을 낸다고 한 데서 그런 유추를 해보는 것이다. ‘바다만큼 들판만큼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그는 내 생의 국물이고 나는 그의 국물이었’다는 과거형 갈무리가 왠지 처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