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성당 2019 문화재 야행
계산성당 2019 문화재 야행
  • 장희자 기자
  • 승인 2019.08.27 0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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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명동성당, 전주 전동성당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성당, 영남지역 최초의 고딕식 서양성당, 81년 9월 25일 대한민국 사적 제290호 지정, 84년 5월 5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문
계산성당 야경: 문화재 야행 축제 비눗방울이 수를 놓는다

대구 중구청과 문화재청이 주관하여 2019년 8월 23일부터 24일까지 약령시 일원 및 청라언덕에서 개최하는 2019 대구 문화제 야행 행사는 골목문화해설사가 미리 현장접수를 받은 시민들을 대상으로 당일 오후6시 부터 9시까지 1일 10회 청라언덕→계산성당→계산예가→이상화ㆍ서상돈고택→김원일의 마당깊은 집   →교남YMCA회관→에코한방웰빙체험관→약령시한의학박물관 코스로 청사초롱 야경투어를 진행하면서 대구시가 자랑하는 계산동성당(사적 제290호), 구 대구제일교회(유형문화제 제30호), 대구 구 교남YMCA회관(등록문화제 제570호) 선교사 스윗즈, 챔니스, 블레어 주택(유형문화제 제24,25,26호), 등 문화재 현장답사를 실시했다

계산성당 재대와 스테인드그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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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성당 강당: 아치형 지붕무늬

천주교 대구대교구 계산주교좌대성당, 통칭 계산성당(桂山聖堂)은 대구시 중구 서성로 10번지에 위치하며 천주교 대구대교구장 대주교의 주교좌 성당이며, 본당의 주보 성인은 루르드의 성모 마리아이다. 1885년 12월 제7대 주선대목구장 마리장귀스타브 블랑(한국명: 백규삼) 주교가 대구본당을 신설하고, 초대본당 주임으로 프랑스의 아킬레 바오르 로베르(한국명:김보록) 신부를 임영하였으며, 로베르 신부는 읍내에서 멀리 떨어진 신나무골에서 3년간 은신했다.

계산성당의 보물 파이프오르간.

1886년 조불 수호통상 조약후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자 1888년 겨울 로베르 신부는 신나무골에서 죽전 새방골(대구 상리동)로 옮겨 3년간 은신했다   1891년 새방골에서 읍내로 들어와서 정규옥 승지댁에서  본당설치 부지를 물색중 현재 계산동 성당 자리와 그 서편에 있는 동산 두 곳을 선정하였고, 신자들이 현 계산성당 자리를 원하여 대구에서는 저지대인 평지에 위치하게 되었다.

계산성당의 스테인드그라스는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과 서울 명동대성당에 이어 우리나라 3번째 건축된 고딕풍의 서양식 성당 스테인드그라스

계산동에 정착한 김보록 신부는 3년만인 1899년 이른 봄 한식(韓式)으로 지은 십자형 가와집 성당과 신부 사랑채와 신자 교육관으로 사용될 해성재(海星齋) 건물 등을 건축했다. 1899년 12월 25일 루르드의 성모께 헌당식과 축성식을 성대히 거행하고, 성모성당이라 하였다. 십자형 성당은 봉헌 축성한 후 불과 40일 만에 1900년 2월 4일 밤 8시경에 지진으로 인한 화재로 모두 소실되었다. 신자들은 큰 충격을 받고 허탈감에 빠졌으나 김보록 신부만은  오히려 더 큰 은혜를 주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화재가 발생한지 1주일 지난 1900년 2월 10일자로 새로운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위한 호소문을 발표했다. 신부는 교회 중진의 협력으로 벽돌로 내화구조와 성당 재건계획을 세우고 손수 설계하여 현재의 계산동 성당은 1901년에 착공했다. 12사도 스테인드 글라스와 함석류, 창호철물 등 국내에서 구할수 없는 각종 자재는 프랑스에서 주문하여, 착공한지 1년 만인 1902년 5월에 고딕양식 성당을 준공하였다. 

계산성당 본당 뒷편 스테인드글라스

1903년 11월 1일 대축일에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성대한 축성식이 거행되었으며, 이 성당은 국내에서도 찾기 힘든 정면 쌍탑의 고딕성당이다. 구조와 세부상세는 오히려 로마네스크 양식에 가깝다고 하겠으나 평면 구성은 전형적인 고딕양식이다. 평면은 라틴 십자형 3랑식 열주의 아케이드를 이루고 천정에 의해 네이브와 아일의 구획이 되어 있다. 주현관은 서쪽 정면의 나르텍스의 좌우 아일부에 2개의 동일한 종탑이 차지하고 있다. 전체 성당은 화강석 기추위에 붉은 벽돌과 회색 벽돌을 쌓았는데, 회색 이형벽돌의 사용은 버트레스와 정면 출입구 및 창둘레,  내부 열주와 천정 리부에 집중하여 구조체와 장식을 겸하도록 하고 있다.

성당 본당 뒷편 스테인드 그라스

특히 정면 중앙에 있는 박공부분의 큰 장미창과 좌우 익랑 박공부문의 장미창은 화려하고 엄숙하다.  2개의 종은 서상돈 아우구스띠노와 정규옥의 부인 김젤마나가 기증하였으며,  영남지방에서는 최초의 웅장한 고딕식 건물의 성전이 세워졌다. 1911년 6월 11일 대구대목구 설정으로 주교좌 본당이 된 대구 대성당(계산동)은 그동안 신자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한 시민이 계산성당 성모님께 기도하고 있다.

1911년 7월 2일 초대 대목구장 드망즈 주교가 본당의 루르드 성모상 앞에서 대목구를 봉헌하는 허원식을 거행하면서 성당의 증축을 소원하고,  김종학 베드로와 한윤화 야고보가 총경비 2만여원을 자진 분담하여, 종각 지붕을 배로 높이고, 성당 뒤편을 물려서 남북으로 증축 공사를 시작하여, 1918년 12월 24일 준공하였으며, 새 성전의 축성식(헌당식)이 1919년 5월 11일 성대히 거행 되었다.

계산성당 문화재야행 개막식에 계산성당과 제일교회가 나란히 있어 성지의 요람으로 느껴진다.

1991년 6월 21일 성당 건립 이후 처음으로 대보수 공사가 착공되었으며, 1992년 8월 14일에 완료하였다. 이어 다음날인 1992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준공 기념 미사가 있었다. 이 공사를 통하여 지붕은 함석을 해체하고 동판으로, 바닥은 목재 대신 대리석으로, 창호, 스테인드글라스, 전기 공사가 이루어졌다. 1984년 5월 5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계산성당을 방문했다. 본당이 처음 건축된  1899년에는 한옥 양식으로 되어 있었으나 지진에 의헤 전소되고, 그 위치에 현재의 서양식 성당을 세워, 1902년 12월 3일 첫 미사를 하였으며 현재의 서양식 성당 또한 경상도 전역을 통들어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점이 인정되어 1981년 9월 25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90호로 지정되었다.

계산성당 광장에 대구문화재 야행 개막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