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이 6.25전쟁 때 숙식했던 청도 만화정과 고택마을
이승만 대통령이 6.25전쟁 때 숙식했던 청도 만화정과 고택마을
  • 장희자 기자
  • 승인 2020.07.16 17: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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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천 절벽에 자리를 잡은 정자 만화정(萬和亭)은 한옥마을의 백미(白眉)
박하담과 후손들의 향학열, 지역 인재양성 의지가 배어 있는 곳
옛서당 건물의 기품, 주변 풍광, 안동 도산서원에 비견될 만큼 미학적
선비들의 풍류와 도학정신, 조국 풍전등화 위기 시 선현들의 조국애
동창천 절벽 위에 자리잡은 만화정은 박하담이 남명(南冥) 조식, 김대유와 도의지교(道義之交)를 이루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장희자 기자

경북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고택마을은 운문산을 지나 솟아난 억산의 한 용맥이 북진하다가 몸을 틀어 서진하던 중, 동창천을 만나며 전진을 멈춘 곳이다. 밀양 박씨 집성촌이자 고택이 밀집한 마을이다.

만화정 앞뜰은 임진왜란 때에 박하담의 후손 14명이 모여 창의(倡義)하면서 의병을 일으킨 중심지였다. 장희자 기자

만석꾼의 외손자인 박하담(朴河淡)이 청도군 이서면 수유리에서 금천면 신지리로 와서 소요당을 짓고 장구지소(杖求之所)로 삼은 후에,  후손들이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된 곳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박하담의 후손들이 의병을 일의킨 중심지였다. 

정자 자체의 기품과 주변 풍광의 아름다움은 안동 도산서원에 비견될 만큼 높은 미학적 평가를 받고 있다. 장희자 기자

신지는 선마리라고 부르고 섶마리라고 쓴다. 섶마리란 섶다리가 있는 언덕에 형성된 마을이란 뜻이다. 섶다리는 동곡에서 신지리로 통하는 다리가 있기 전에 가을이면 나무를 가지고 다리를 놓았다가 여름에 큰비에 떠내려 가도록 한 것을 말한다.

신지리에는 중요 민속 문화재 제106호인 청도 운강고택 및 만화정을 비롯하여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인 섬암 고택, 도일 고택, 명중 고택, 운남 고택 등이 밀집해 있어 신지리 고택마을이라고 불린다. 현재 약 40동의 한옥이 있는데, 그 중 중요한 고택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①만화정(중요민속문화재 106호)

만화정(萬和亭)은 본래 조선 중기 성리학자인 소요당 박화담이 건립한 서당의 유허지이며, 소요당의 11세손 되는 박정주가 분가해 지은 살림집이었다. 이후 그의 아들 운강 박시묵과 운강의 증손자되는 박순병이 건축물을 더 확장하여 정자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만화정을 둘러싸고 있는 언덕배기의 소나무군락. 장희자 기자

동시에 근대화 교육의 강학소(講學所)로 사용하면서 운강의 아들 진계 박재형은 불후의 명저인 해동속소학, 해동속고경중마방 등 38권의 저서를 남긴 학문의 요람이다. 운문천변 절벽 위에 세워진 정자 건물은 선비들의 호연지기를 느낄 수 있는 명승지였다.

운강고택은 집 앞에 나 있는 고샅길을 따라서 들어가면, 고택으로 들어가는 문을 통해 마당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장희자 기자

그 당시에는 마을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했는데, 절벽 위에 멋지게 자리 잡은 아름다운 한옥의 누마루 정자는 선비들에게 별장 같은 의미였다. 고택과 함께 중요 민속 문화재 제106호로 지정되어 있다. 살림집으로 꾸며진 3동의 건물과 본채인 만화정 정자가 있는 ‘ㄱ‘자형의 건물과 작은 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솟을대문에는 운강고택이란 당호의 편액이, 격자형 살창 위에 걸려 있는 게 이채롭다. 장희자 기자

만화정 뒤에는 세심대라는 정자가 있었고 1960년대에 허물어졌다. 언덕에는 지금도 바위에 세심대와 시문들이 세겨져 있다. 소요당의 증손자 용암 박숙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소요당의 손자와 증손자들로 조직된 14의사(義士)를 조직하여 만화정 앞들에서 창의(倡義)했다. 근대에 와서는 6.25때 이승만 대통령이 피난민들을 격려하기 위해 동창천에 왔을 때 숙식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② 운강 고택(중요 민속 문화재 106호)

신지리 고택 마을의 가장 중심이 되는 건축물로 박하담이 벼슬을 사양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서당 터를 세운 조선 후기 주택이다. 1809년(순조 9) 박정주의 살림집으로 지은 후, 1824년(순조 24) 운강 박시묵이 증축하였다. 주택으로는 드물게 규모가 크며, 안마당과 안채 후원, 사랑채 후원 등 넓은 여유 공간을 두고 있다. 건물 배치는 사당을 맨 안쪽에 두고, 그 앞에 두개의 ‘ㅁ‘형 건물군을 결합시키고 있다.

대지가 1천700여 평이나 되고 마당도 넓지만, 풍수영향으로 정원수를 심지 않은 게 특징이다. 장희자 기자

③ 섬암고택(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268호)

박시묵의 아들 박재소가 분가하면서 세운 가옥이다. 1873년(고종 10) 섬암 박병현이 거주해서 섬암고택이라고 불린다. 안채를 제외한 중사랑채, 곡간채 등이 일자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안채는 ’ㄱ’ 자 형태이다. 모두 남향을 하고 있으며, 대문채는 동남향을 하고 있다. 1990년 국도 확장 시에 대문채가 철거되었으며 현재는 중사랑채와 헛간채, 중대문채 정침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④ 도일고택(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271호)

박시묵의 동생인 박기묵이 1999년(광무 3) 합천군수로 재임 시 건축하였다. 이후 박시묵의 삼종질인 도일 박재수의 소유로 되었으므로 도일고택이라 한다. 안채, 사랑채, 별당채, 헛간채,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다. 각 건물은 ‘ㅡ’자형 건물이며, 안마당을 중심으로 전체적으로 ‘ㅁ’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

⑤ 운남고택(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270호)

박시묵의 셋째 아들 박재중의 집으로 1865년(고종 2) 기공하였으나, 1869년 박재중의 사망으로 건축이 중단되었다.  이후 운남 박좌현이 1892년(고종 29)에 완공하고 거주하여 운남고택이라 부른다. 대문채를 들어서면 정면에 사랑채가 보이고 사랑채 왼쪽에 안채와 연결되는 문이 있다. 그 안쪽으로는 헛간채와 안채를 분리하여 ‘ㄴ’자형으로 배치하였다.

운남고택은 운강고택 입구에 놓여 있어서 운강고택 주변 경관을 고풍스럽게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장희자 기자

⑥선암서원(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79호)

박하담과 김대유의 사후 두 사람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1577년( 선조 10)에 건립하였으며, 1676년(숙종 2)에는 군수 서문중이 중건하였다. 1868년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면서 선암서당이라 하였고, 1878년(고종 15)에 박하담의 후손들이 지금의 건물을 다시 지었다. 서원 안에는 강당을 비롯하여 득월정, 선암서당, 장판고(판목 보관각), 살림채, 문간채 등이 있다. 대문간채로 들어서면 왼편으로는 살림채가 있고, 오른편에는 득월정과 가운데 행랑채가 ‘ㅁ’자 형태로 둘러져 있다. 행랑채를 들어서면 선암서당이 북향으로 앉아 있다. 선암서원은 2010년  전통 고택 숙박체험관으로 개장했다.

선암서원 주변으로 용두암, 용두소, 소요대가 있고, 뚝뫼, 봉황애 등이 조망되어 풍광이 뛰어나다. 장희자 기자

⑦명중고택(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 269호)

박시묵의 손자인 박래현이 1881년(고종 18) 별서로 건립한 건물이며, 그의 둘째 아들 명중 박순희가 분가하여 살림집으로 입주하였으므로 명중 고택이라 한다. 정침, 방앗간채, 곡간채, 중사랑채, 사랑채, 대문간채 등 6채로 이루어져 있으며, ‘ㄹ’자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었다. 1990년 국도 공사로 대문간채와 사랑채를 철거하였고, 중사랑채도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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