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70)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70)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4.06.01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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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따리를 싸야 한다면 행랑아범을 설득하여 미련 없이 떠나리라 다짐이다
무서리가 흠뻑 내린 듯 ‘싸’하리란 상상과는 달리 화기애애하다
진수성찬 상을 보는데 흡사 미늘을 감춘 낚시의 밑밥만 같다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계림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계림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그래 그까짓 묫자리가 뭔 대수라고! 죽으면 다 그만인데! 까마귀밥이면 어떻고, 참새가, 까치가 파먹고 쪼아먹으면 또 어떻단 말인가? 저 멀리 높은 산을 넘고 깊은 강을 건너 어느 나라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조장(鳥葬:시체를 들에 내놓아 새가 쪼아 먹게 하는 원시적인 장사법)이라고 일삼아 새에게 시체를 내준다는 데! 어떻게 보면 그 또한 소신공양(燒身供養:자기의 몸을 불살라 부처 앞에 바치는 일)에는 비할 바가 아니건만 일종의 육(肉) 보시라, 죽으면 절로 썩어 없어질 몸뚱인데 그 또한 따지고 보면 좋은 일 아니던가? 암 그렇지! 나도 이젠 남의 가슴에 대못 박는 그런 삶에 진저리가 일 구만! 그래~ 그럴 바에는 하루만이라도 사람답게 살다 가면 그 또한 보람된 삶이자 최고의 삶이 아니던가?” 속으로 다짐하여 읊조리는 행랑어멈은 이번 일로 마님의 노여움을 사고, 보따리를 싸야 한다면 행랑아범을 설득하여 미련 없이 떠나리라 다짐이다. 날갯죽지가 부러진 새가 된다고 할지라도, 비에 젖은 쇠박새의 초라한 신세가 될지라도 마음만은 홀가분하게 대문을 나서리라 하늘로 향하는 눈길이다.

그런 가운데 동녘 하늘 가장자리를 지나 포물선으로 궤적을 그려가는 태양이 하늘 중앙으로 무게 중심추를 옮겨 갈 즈음에 강시(僵屍:얼어죽은 시체) 모양의 동네 남정네들이 하나둘 대문간을 들어선다. 그 뒤를 바짝 따라서 덕배 내외가 고개를 숙이고는 늑장 걸음이다. 뜻밖의 모습에 다들 뜨악한 눈길로 행동거지를 쫓는다.

덕배네로 말할 것 같으면 현재 소작인이 아니다. 전년까지만 해도 소작인으로 있었지만 늘 불만투성이 인지라 작년 말경에 이르러 대판으로 난장질 끝에 소작인에서 제외되었다. 그 바람에 끈 떨어진 연 신세로 겨우겨우 일 년을 버티어가며 견디어내는 중이다. 근근이 날품팔이 신세로 군색하게 입에다 풀칠로 살다 보니 처진 어깨가 한 눈에도 애처롭다. 그렇더라도 이 자리는 소작인들만 참석할 수 있는 자리다. 한데 어쩐 일인지 대문간을 들어서고 있다.

들려오는 소문에는 남사당패에서 눈이 맞아 부부 연을 맺었다는 내외는 그동안 끼니를 굶어가며 애면글면 모아놓았던 구렁이 알 같은 밑천도 야금야금 축을 내는 통에 현재는 알거지 신세다. 주위 사람들이 의뭉스러운 눈길로 지켜보는 가운데 덕배가 숙였던 고개를 발딱 들더니 오지게 내질러 한마디다.

“다들 비렁뱅이를 보는 듯 그런 눈으로 져다 보지 말아요! 누군 여기에 오고 싶어 온줄 아남요! 행랑아범이 기어이 오라 기별해 왔기에 어쩔 수 없어 왔으니께!” 풀이 죽는다.

“그러~ 그라! 맞네! 맞아! 작은 마님이 특별히 기별을 넣으라 해서 온 것이 맞구먼!” 행랑어멈이 거들고 나서자 땅을 내려다보며 미적거려 얼굴을 붉히던 복녀가 기다렸다는 듯 한마디 거들어서

“거봐요! 그러니까 밥을 빌어먹든 죽을 얻어먹든 말든 괄시([恝視]를 말아요!” 치마끈을 입에 물어 잘근잘근 씹더니

“그럼 나는요! 고구마, 배추 찌짐을 붙여요! 아니면 소고깃국을 끓어요? 밥을 할까요? 어디든 싸게싸게 한자리나 줘 보셔유!” 두리번 자리를 찾는다.

“하이고 이 여편네가 일은 무슨 일, 오늘은 그저 손님으로 왔으께 편하게 쉬게!” 행랑어멈의 한 마디에 일단락인데 대문간으로는 고개를 떨군 소작인의 발걸음이 꾸역꾸역 이어지고 있다. 다들 어기적대며 걸어오는 모양새가 심통이 잔뜩 난 표정이다. 옆에서 누군가 부아를 질러 알짱거린다면 분풀이 겸 다짜고짜 한 주먹 내지를 기세다. 사나흘 전인가? 밤을 잊은 산새 울음이 구슬픈 어느 날 저녁 마누라와 또박또박 맞춘 셈이 머릿속에 쌀독을 비워가며 뱅글뱅글 도는데 어찌 아니 그러하겠는가?

살라미로 야금야금 뜯겨나갈 재물을 생각하자니 절로 가슴이 아리다. 이럴 땐 그저 술이 최고라, 속상한 마음에 새참으로 동동주 한잔을 걸쳤건만 씻어지기는커녕 억울한 마음은 분기탱천으로 더해만 간다. 한데 집안 분위가 예상과는 딴판으로 사뭇 이상하다. 무서리가 흠뻑 내린 듯 ‘싸’하리란 상상과는 달리 화기애애하다. 아이도 마누라도 왜 이제야 오느냐는 표정으로 환하게 웃고 있다. 게다가 아이들은 아이마다 얼마나 푸지게 먹었는지 살 오른 두꺼비가 꽃뱀을 만나 헛바람을 잔뜩 집어넣은 모양 툭툭 불거졌다. 가쁜 숨을 몰아가며 슬슬 배를 쓰다듬는 모습이 세상없이 행복한 얼굴이다. 상 위로는 아직 못다 먹은 음식들이 즐비한데도 엉덩이를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 앉았다. 더러는 소화를 시키려는지 투덕투덕 장난을 걸고 있다. 아이들이야 먹을 것이 공으로 생겨나고 배가 불러 웃는다지만 속없는 팔푼이처럼 마누라는 어째서 웃고 있을까? 머리를 맞대 셈을 하던 그 밤을 그새 잊었단 말인가? 잔머리를 짜 궁리할 때의 눈자위를 하얗게 뒤집어 다잡던 마누라의 얼굴은 진정 아니었다. 마누라의 까닭 없는 웃음에 마음이 다소 풀어지는 것도 잠시, 대청마루에 마련된 상을 대하는 순간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전신이 딱딱하게 굳는다.

굳어진 마음과는 달리 상은 소문난 잔칫집처럼 산해진미로 가득하다. 고소한 기름기가 코를 찌른다. 육류 특유의 냄새에 절로 군침이 돌고 농익은 미주의 향기를 코가 저 먼저 알아서 벌름거린다. 춘향전에서 변 사또의 생일상을 두고 암행어사 이몽롱은 시를 통해

“금동이에 담긴 좋은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옥쟁반에 담긴 안주는 만 사람의 기름이라/ 촛농이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이 떨어지고/ 노래소리 높은 곳에 백성들의 원망소리 높도다”로 읊어 비꼰 것처럼 차려진 음식상을 보는데 저것은, 지난날 덕배가 입버릇처럼 부르짖던 말이 참말인 듯싶다. 저것 전부는 우리네가 한여름 뙤약볕 아래 흘린 피땀의 결과라는 생각이 들자 뼈를 추리는 것만 같다. 전신으로 전율이 느껴진다. 살을 뜯기고 피를 뽑힌 기분으로 선뜻 수저 들기가 주저되는 한편으로

“대를 이을, 독자 집안으로 득달같이 아이가 생긴 것은 마땅히 축하할 일이나 그렇다고 그 육아비용을 왜 우리 소작인들이 십시일반으로 부담해야 하는가?” 자문자답으로 묻고는 땅이 꺼지게 한숨이다. 이는 몇몇 사람의 속내가 아니라 상을 둘러앉은 거의 전부가 대동소이로 같은 생각이라 머뭇거리는 모양새다. 진수성찬 상을 보는데 흡사 미늘을 감춘 낚시의 밑밥만 같다. 눈에는 보이지 않건만 이마에다 붉은 수건, 황건적처럼 노란 수건을 두른 듯 철석간장으로 항거하고 있는 형상이다. 다만 걱정되는 점은 일이 잘못되어 덕배처럼 소작으로 붙이던 전답이 가없이 떨어질까? 그것이 걱정이다. 그런 까닭에 서로가 한발 물러서서는 눈치 싸움이 치열하다. 제풀에 겨운 그 누군가가 나서주기를 은근하게 가늠하고 있는 형상이다. 그런 가운데 입 한번 벙긋 못하고 소작료를 올려주는 불상사를 걱정하는 모습이 역력해 보인다. 종래는 얼마간의 알곡을 강탈인 듯 내놓는 사태에 직면한다면 몇 날 며칠을 두고 마누라의 바가지에 시달리는 처지로 전락이란 생각에 눈앞이 아득하다. 형세가 호랑이 등을 탄 것처럼 마음은 좌불안석이다. 그런 까닭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지경서 헤어나지 못해 가시방석에 앉은 듯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눈을 돌려 대청 아래를 보자 마누라들은 마누라마다 ‘뭐해! 뭐 하는 거예요! 어째 입도 뻥긋 못해요!’ 홉뜬 눈으로 연방 부채질이다. 난감한 지경에 배는 또 왜 일삼아 고파 오는지! 당장 홍시가 익어가는 듯 달짝지근한 술 한잔에 안주로 기름기가 잘잘 흐르는 닭 다리를 잡아 게걸스럽게 뜯고 싶은데 마냥 시간만 흘러간다. 급기야 이판사판으로 죽을 때 죽을 값이라고 먹고 보자는 심사에 수저를 들고 움찔거리는데 행랑아범이

“아~ 이 사람아! 사람들하고는 언제까지나 이러고 앉아만 있을 거야! 음식에 독이라도 넣었을까 봐서 그러나! 염려 말고 양껏, 마음껏 드시게!” 재촉인데 누군가가

“아~ 글씨! 먹고 싶은 맘이야 꿀떡 같지만 어째 목구멍으로 수월하게 넘어 갈러나 껄쩍찌근 하구만! 설마하니 우리같이 하찮은 맥숨 줄이 뭣이라고 독이야 넣었을까만은! 까딱 잘못 먹다가 목구멍으로 가시라도 걸릴까 그렇지!” 비꼬는 듯 삐딱한 말에 둘러앉은 모두가 고개를 끄덕거려 동조란다.

“암~ 암~ 그렇지! 멋모르고 덥석 먹었다가는 체하지 아니 그러한가?” 또 그렇단다. 할 수 없다는 듯 다시 전면으로 나서는 행랑아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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