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덕배란 작자가 불한당 같아 고생 깨는 하는 모양이라 했다
허리띠를 조르고 졸라매어도 계산은 손금을 보듯 빤하다
“예~ 예~ 그렇게만 된다면 하찮은 이년에게는 더 이상의 영광이 없어 백골난망입니다. 감사합니다”
“또~ 또 그런다. 내 그라지 말라니까!” 언짢은 얼굴로 타박하는 마님의 치마폭에 얼굴을 묻어 훌쩍이던 행랑어멈은 그날로부터 수일이 지난 어느 가을날 고모 앞에서 눈물을 보이며 머리를 조아렸다. 하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이미 시어머니로부터 언질을 받은 고모는 짐짓 모르는 척 장난기가 도져 샐쭉한 표정을 짓는다.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어멈이 미워요! 야속해요!” 야윈 가슴-패기를 두 주먹으로 번갈아 가볍게 ‘콩콩’ 두드리며
“어멈은 참말 못 땠어요! 그때 나는, 그때 나는 얼마나 외로고 서러워서 꺼이꺼이 울었는지 모른다고요!” 눈을 흘기는 중에 얼굴을 벌겋게 붉히고 고개 숙인 행랑어멈을 일으켜 앉혀서는
“어멈에게는 내가 뭔 말을 못 해요! 꼭 바보 같아요! 어린 소녀만 같아서 하찮은 농담을 못 해요!” 꼭 잡았던 두 손을 살며시 놓고는 얼굴을 가슴에 묻어 잠시 멈칫하던 고모가
“아~ 냄새 좋다. 아~ 이 된장 냄새가 코에 달짝지근하여 좋고, 짭짤한 간장 냄새에 머리가 아찔하니 황홀하고, 가슴으로 민들레도 싹을 틔우는 것 같고, 터앝으로 당귀도 올망졸망 자라는 것 같아! 아~ 진정 울 엄마 냄새만 같아서 너무 좋아요!” 가슴을 파다가는 은근하게 속적삼을 들쳐서 손을 집어넣는다. 장난끼를 담아 젖꼭지를 조몰락조몰락 매만진다. 고모의 가살스러운 그 모습을 딸인 양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행랑어멈이 된장이나 간장, 민들레는 그렇다 치더라도 한약을 달이는 것도 아닌데 웬 당귀 냄샐까? 고개를 갸우뚱한다.
“아씨 마님은! 다 말라 비틀어진 젖꼭지가 뭐에 만질 게 있다고, 짓궂기도 하서랴!”
“...!”
“그런데 혹 아씨 마님 가끔은 외로우세요! 그럼 말동무라도 한번 사귀어 보시던가요? 그러면 한결 덜 심심할 거여요!”
“말동무~ 동무라~!” 동무를 아련하게 입에 올리는 고모는 옥자가 그리웠다. 한 살 아래건만 늘 언니처럼 고모를 품었던 옥자다. 짧은 처녀 시절, 심한 장난질에 억지를 부려도, 투정을 부려도, 심술궂게 굴어도 늘 웃음으로 대해주던 옥자다. 고모가 시집올 무렵 부러워선지 잠시 동생으로 돌아가 투정을 부리는 것도 한순간, 한결같이 의연했던 옥자다. 그 옥자가 행랑어멈의 말동무라는 말에 눈물 나도록 그립다.
“아~ 옥자는!” 하는 고모는 자신도 모르게 젖꼭지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깜짝 놀라 올려다보는 행랑어멈의 눈 밑이 촉촉이 젖었다. 꿈을 꾸는 듯 아련하다. 고모의 짓궂은 손길에서 난리 통에 소식이 끊어진 딸을 그리는 모양새만 같다. 그도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던 행랑어멈이 조용히 손을 들어 고모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다가는 지나가는 말투로
“저~ 아씨 마님! 혹~ 복녀라고, 민요면 민요, 어름사니를 흉내로 노래면 노래라고 신명으로 잘 부르는 아낙넨데 혹 아세요?”
“아니요! 나는 금시초문으로 모르겠는데요!”
“저기~ 거시기! 거~ 있잖아요! 덕배 처라고 모르세요?”
“아~ 그럼 심심찮게 어느 여름날에는 농익은 돌배를, 제철을 잊지 않고 살구, 앵두, 토마토에 밤을 보내주고!”
“예~! 바로 그 아낙네 말입니다” 은근하게 복녀를 들어 추천하는 행랑어멈은 얼추 연배도 비슷하여 잘 어울릴 거라 했다. 단지 그녀의 서방으로 덕배란 작자가 불한당 같아 고생 깨는 하는 모양이라 했다. 게다가 이년 여를 소작인으로 전답을 붙이다가 제풀에 나가떨어졌다며, 소작도 떨어진 마당에 삼시 세끼, 끼니나 제대로 챙기는지 모르겠다며 한숨이다.
“아씨 마님 그래서 말인데요!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말을 잇던 행랑어멈은 가슴이 뜨끔한지 눈을 껌벅이더니
“쓸데없이 나이만 먹어 오줄없는 이년 할 소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래도 아씨 마님! 한 번 용기를 내보세요! 기왕에 베푸는 인심이라면 가여운 복녀란 그 아낙도 또 그 집도 어여삐 여겨서 한번 돌아봐 주세요!”
“그래요! 그런 일이라면 진즉에 귀띔을 않고는! 하여튼 어멈은 병을 주고 또 약을 주고, 당최 왜 그래요! 미워요~ 아주 미워 죽겠어요!”
“...!”
“한데 이렇게 구차한 처지의 나를 복녀라는 곰살맞은 그 아낙이 싫다 않고서는 선뜻 받아주기나 할까요?”
“그럼요! 아씨 마님이 어때서요! 원래 동무란 마음으로 사귄다지만 정 안되면 재물의 힘을 빌려 보세요! 그러한 중에 말을 섞고, 그렇게 차차 정이 들고나면!”
“정이 들면, 마음이! 하여간 어멈은 생각할수록 얄미워요!” 고모는 심술궂게 와락 행랑어멈의 젖무덤을 움켜쥐었다 놓으며
“아이 좋아라!” 딸처럼 허리를 껴안아 애교다. 그런 다음 모녀인양 나란히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고모가 미리 준비한 대붕 감의 얇은 껍질을 차곡차곡 벗겼다. 마침내 대붕 감이 벌겋게 속살을 드러내자 행랑어멈 눈앞으로 불쑥 들이밀어
“자~ 그럼 우리 어멈부터 한입!” 재촉하는데 팔을 휘휘 내두르며
“어째! 아니 아니에요! 이 천한, 천한 이년이 먼저라니 몰매를 맞아도 시원찮을!,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완강하게 거부하건만 고모가 한 번 내놓은 고집을 천하의 행랑어멈이라 해도 꺾을 수는 없었다. 어머니 같다며, 장유유서 따라 어른이 먼저라는 데는 기어이 옆으로 살짝이 베어 무는데
“에이~ 아기 입도 아니고, 고작 고만큼, 이번 건은 무효야 무효!” 무효를 부르짖는 고모 앞에 행랑어멈은 다시 한 입 베어 문다. 다음으로 고모가 한입, 그렇게 둘은 다정스럽게 한 입씩 나란히 대붕 감을 나누어 먹는 것으로 아린 과거의 기억을 달콤한 추억으로 승화시켰다.
그런 가운데 유수 같은 시간이 흘러 어느덧 계절은 겨울철로 접어들고 있었다. 쌀쌀한 바람이 작년에 갔던 각설이가 돌아오듯 동네 골목골목을 누벼 달갑지 않은 인사다.
급기야 새벽이면 무서리가 하얗게 나날이 내리는 때를 맞아 게으른 몇 집을 빼고는 얼추 바심도 끝나가고 있었다. ‘와~롱! 쎄~롱’ 돌아가는 탈곡기의 등쌀에 쌓여만 가는 나락(‘벼’의 방언)더미 만큼이나 배가 부른 가을이다. 지난여름 내내 풍백(風伯), 운사(雲師), 우사(雨師) 등이 순조로웠는지 소출도 쾌나 쏠쏠하다 보니 절로 신바람 넘치는 타작마당이다. 시퍼렇게 몸집을 불려가는 무청을 낫으로 ‘썩썩’ 깎아 한입 베어 물고는 묵직한 볏단을 탈곡기에 밀어 넣는 손으로 불끈불끈 힘이 들어간다. 얼굴 가득 자글자글 깃들었던 주름살이 환하게 펴지는 가을날이기도 했다. 마당 가득 수북이 쌓이는 나락더미 만큼 고생보다는 희망이 부풀어 재미를 더한다. 한 말은 덜어내어 설빔으로 새 옷을 장만하고, 또 한 말을 들어내어 비린 반찬을 장만해 온 식구가 둘러앉아 비린 말을 주고받으며 배불리 먹을 수 있다겠는 생각에 세상이 절로 살만해 보이는 가을 타작마당이다.
그날 저녁 일찌감치 저녁상을 물린 내외가 나란히 호롱불 아래 머리를 맞댔다. 일 년치 농사도 끝난 만큼 따따부따 내년의 살림살이를 알뜰살뜰 계산하는 중이었다. 소작료를 떼고, 나라에 바칠 세곡을 계산하고, 봄철에 빌려다 먹은 장리 벼에 이자 등을 시시콜콜 따져서 셈을 하고 보니 별로 남는 것이 없다. 푸짐하게 허울만 그럴싸하고 실상은 쪼들리기가 마찬가지다. 그저 생애가 허탈하기만 하다. 황금 물결이 일렁거리는 들녘을 바라다볼 때는 내년 보릿고개는 무난하리라 여겼다. 한데 초근목피가 아니라면 여전히 굶을 팔자다. 허리띠를 조르고 졸라도 계산은 손금을 보듯 빤하다. 삼일 피죽 신세를 면할 길이 없어 보인다. 결국에는 고리대금으로 비싸건만 굶어 죽지 않으려면 장리 벼는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재차 잘못이 없나 살펴서 셈을 계산하는 입에서 절로 욕지거리가 걸쭉하게 일어 침을 튀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