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 내력인지는 내 모르겠지만 오늘 손해날 일은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런 하찮은 걱정일랑은 붙들어 매시고 얼른 자시기나 하게! 다 자시고 나면 선물인지, 복인지는 모르겠네만 하여간 마님의 뜻을 토시 하나 안 빼고 고스란히 전달하겠네!” 술 주전자를 들어 손님 대접으로 맞은편으로 앉은 덕배 잔부터 우둠지로 넘칠 듯 가득 따른다. 그리고 다음, 다음으로 잔이 채워지는데 돌아가는 술 주전자가 물꼬 터진 봇물만 같다. 가득 채워진 술잔을 대하는데 아직 확실하게 정해지지도 않은 마당에 미리부터 겁을 집어먹을 필요는 없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게다가 뭔지는 알 수 없건만 선물을 준단다.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화끈하게 한잔을 비운 사람들이 급기야 밥을 뜨고 국물을 후룩후룩 마신다.
고봉의 하얀 이밥에 국물을 들어 애써 고깃점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고, 어느 요란한 잔칫집에서 소가 건너간 국물을 마셨다는 푸념이 쑥 들어간다. 저마다 국그릇을 들고 보는데 눈이 휘둥그레진다. 고깃국에 수저를 찔러 가는데 한마디로 물 반, 고기 반으로 마실 국물이 오히려 부실한 지경이다. 숟가락을 뒤집자 소고기, 고깃덩이가 통째로 ‘툭툭’ 불거져 벌겋게 유혹이다. 웬 떡인가 싶어 한 한 덩이를 숟가락으로 떠서는 입안으로 밀어 넣는데 목구멍에서 살살 녹는다. 게다가 각각의 상마다 토실토실하게 살이 오른 백숙이 안주입네 보란 듯 덩그렇게 올라앉았다. 시작이 반이라고 술과 안주가 교대로 입안으로 사라진다. 잠시 전까지 눈을 부라리던 신경전은 오간 데 없고 걸쭉한 농담이 줄을 잇는다. ‘천 사람의 피요, 만 사람의 기름!’ 따위는 이미 지난 과거지사다. 다들 얼굴마다 술기운이 올라붙어 울긋불긋 불콰하다. 배가 불러 숨쉬기가 가쁠 즈음이다. 그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앉았던 행랑아범이 이제는 때가 되었다는 듯 일어서더니
“어~ 어험!” 헛기침 두어 번에 미리 준비한 종이를 펼쳐 읽기 시작이다.
“에~ 또 다들 아시다시피 가을 추수도 얼추 끝난 마당에 잠시 전달 사항이 있어 바쁜 와중에 이렇게 모이라고 한 점에 대해서는 먼저 고개 숙여 사과하는 바입니다. 또 이러한 발표는 마름으로 계시는 우리 장(將) 씨 어르신께서 하셔야 함에도 부득이 제가 나서게 된 것에는 작은 마님의 특별한 부탁 때문이라는 점을 일차로 알려드립니다” 좌중을 둘러보더니 엣~또 어~ 어험! 헛기침으로 목청을 가다듬고는
“먼저 저기 저~ 덕배, 덕배 자네는 말이야 지난 과오(過誤)를 생각하면 어림없지만, 작은 마님이 어떻게 무인지경의 자네 형편을 아시고는 특별히 땅을 내주라 하기에 불렀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눈길인데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명한 표정의 덕배는 그저 뭔 소린가 싶어 어안이 벙벙하다. 울 담 밑으로 뚝 하니 떨어지는 호박도 아니고, 이 무슨 복이 넝쿨째 들오는 소리란 말인? 쥐뿔도 없는 것이, 자발 없어 그동안 왜 동네방네를 들어서 터진 입이라고 지주댁을 죽일 연놈으로 떠들고 다녔나 후회스럽다. 달랑 불알 두 쪽인 주제에 복녀의 충고는 귓등으로 흘려 무슨 영화를 보려고 선동했을까 싶다. 그 결과 소작은 떼이고, 지난날의 설움을 생각할 때 울컥울컥 눈물이 앞을 가린다.
사람이 근본이 있어야 하는데 근본이 없다 보니 목구멍을 넘는 술을 소태를 씹어 독약이요! 같은 일을 해도 푸대접만 같아서 밥을 먹으니 입의 모래라! 단박에 머리를 대청마루에 퍽석 처박으며 엎어진다. 메인 목을 ‘컥컥’이며 황소 울음소리로 울먹여
“이런~ 광영이 어디에 있습니까? 지난날을 생각한다면 단매에 처맞아 죽여도 시원찮을 이놈이 생각이고 자시고 어디 있겠습니까? 그저 그리만 해주신다면 백골이 난망입죠! 아니~ 아니 그래도 내년에도 구체 도리가 없으면 빌어먹을 강아지 모양으로 야반도주, 쥐도 새도 모르게 뜨려고 했구먼요! 한데~ 한데~ 그~ 크나, 크신 작은 마님의 은덕에 감읍, 이제부터는 죽은 듯이, 땅만 파먹는 굼벵이처럼 착실하게 농사꾼으로 살 것습니다. 그러문요! 하문요!”
“아~ 그런가? 그럼 그런 다행한 일이 없고, 그리고 말이야 미리 말해 두겠는데 덕배 자네 말이야~ 내년 농사 종자는 걱정하지를 말게! 작은 마님께서 일체를 알아서 무상으로 내어주라는 구만! 어떤가?”
“감지덕지, 작은 마님의~ 보살님 같은 배려에 그저 이 미련한 놈은 눈물이 앞을 갈릴 뿐입니다” 옆으로 눈길을 돌리는 저만치로 처연하게 행랑아범의 입만 뚫어지게 바라보며 앉은 복녀 역시 눈을 동그랗게 감격에 겨운지 옷고름으로 눈물을 닦아내기가 바빠 보인다. 그간 마음고생이 어지간했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막연하게 오라는 곳이 없는 가운데 삶을 터전을 뜬다는 것이 예삿일이 아니다 싶었을 게다. 게다가 고향을 등진 두 집안의 불행을 나의 불행인양 여겨 보는데 엄두가 나질 않는다. 나아가 덕배 아낙인 복녀의 뱃속으로는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아이가 자라나고 있다. 아직은 표시가 미미하다지만 곧장 열 달을 채워서 태어날 자식을 생각하는데 나날이 한숨인 데는 어찌 아니 그러하겠는가?
“그럼 덕배, 자네 일을 그만치로 매듭을 짓고, 오늘 다를 이렇게 모이라 한 것은 일주일 뒤 날을 잡아서 창고 정리를 한 예정인데 여하한 일이 없는 소작인들은 아낌없는 협조를 해달라는 것입니다”란 말이 행랑아범의 입에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거~ 보아란!’ 투의 비아냥거림이다. 잘 먹일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며 투덜거린다.
“우리 같은 까재(가재) 복에 선물은 개뿔, 어디서 굴러온 개뼈다귀 같은 불한당만 좋은 일이지!” 입이 두어 발이나 불거져 불만 가득한 표정이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란 것이 여하한 경우에도 공짜는 없다는 것이 진리란다. 두서없이 먹고 보니 꼬임에 빠진 듯 품삯도 없는 일에 부역처럼 동원된다는 생각에 다들 억울하다는 표정이 역력해 보인다. 봄부터 지금껏 뼈 빠지게 농사일에 시달렸는데 또 공으로 시달린다는 생각에 억울하다는 표정에 얼굴색이 붉다. 어떻게 하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갈까? 이런저런 궁리로 다들 고개가 무겁다. 그중 멍한 표정의 덕배 내외만은 눈치를 살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어정쩡하게 앉았다. 그도 잠시 행랑아범의 다음 한마디에 좌중은 곧장 기쁨으로 들뜬다. 오지 말라고 해도 기어이 오겠다고 아락바락 목에다 핏대를 세운다.
“에~ 또 우리 작은 마님께서 말씀하시길 그동안은 공짜였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울력 차 품앗이로 나서는 소작인에 대해서는 품삯으로 나락 한 가마니를 주라는 구만!” 행랑아범이 나락 한 가마니를 강조하여 품값으로 말하는데 어디선가 숟가락 떨어지는 소리가 ‘쨍그렁’ 방정맞다, 하지만 다들 놀라기는 마찬가지다. 대청마루 밑에서 예의주시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던 마누라들까지 잘못 들었나 얼굴을 마주 보며 쑥덕거리더니
“아~ 나락이 한 가마니라잖아요! 뭣 해요!” 늦으면 손해라도 보다는 듯 저마다 한마디씩이다. 조건 없이 손을 들라며, 응하라며 눈을 동그랗게 떠 재촉이다. 먼저 성질 급한 수돌네가 못 참겠다는 듯 입이 씰룩거리더니
“아니 임자는 그날 아무 일어 없잖아! 설렁 있다손 치더라도 지줏댁일인데 만사를 제쳐서라도 일손을 보태는 게 소작인 된 도린데 뭘 꾸물거려요!” 눈을 치켜뜬다. 이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하루 품삯으로 나락 한 가마니는 그간 듣도 보도 못했기 때문이다. 겉보리 한 됫박이라도 감지덕지로 고개를 숙여야 할 판국인데 나락이 한 가마니라니! 당장 내년 보릿고개가 무난해 보인다. 그간 없어 못 먹는 통에 배곯았던 자식들, 그 자식새끼 얼굴 위로 누렇게 황달기가 돌고, 머리마다 마른버짐이 허옇게 피는 서러운 세월은 간신히 면했다 싶어선지 서러운 눈물이 ‘왈칵’이다. 행랑아범이 처음 한 말처럼 선물이 한 보따리만 같다. 우여곡절 끝에 시집간 딸년이 십 년을 공들인 끝에 임신 소식을 전해 오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이 끝으로 전부는 아니었다. 놀라고 감사할 일이 줄을 이었다. 다음으로 행랑아범은
금년부터 그동안 나라에 바쳐오던 세곡 전체는 소작인들이 부담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세곡 전체를 작은 마님이 부담한다는 취지다. 이어 소작인의 장리 벼에 대해서는 그 이자를 반으로 탕감한다고 했다. 여기에는 조건이 붙는데 향후 봄철을 맞아 장리 벼를 내어 다시 장리를 놓아 차액을 노리는 소작인은 그 혜택을 전면 취소라고 했다. 다음으로 금년 소작한 전답에 대해서는 명년을 들어 그대로 승계를 하겠다고 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 소작을 포기하는 외에는 굳이 문서를 작성하지 않아도 묵계처럼 그대로 간단다. 덧붙여서 향후 소작을 포기하는 사람이 생길 시는 가장 어려운 소작인을 우선시하여 계약하겠다며 좌중을 둘러서 의견을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