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수필] 나의 일흔 번째 생일
[기자 수필] 나의 일흔 번째 생일
  • 강지윤 기자
  • 승인 2023.08.07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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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위계질서가 무너지고 잠시 동안 혼돈과 무질서가 지나가자, 뜻밖의 '축제의 장'이
대소가 며느리들이 한복 입고 큰절하던 시대 지나고
K-팝에 빠진 손주녀석들이 자발적으로 풀어내는 즉석 공연에 열광

지난해 1월 생일을 맞았다. 일흔 번째 나의 생일. 하루가 다르게 확진자가 늘어가고 방역 수칙이 엄격해 외식하는 것도 모이는 일도 불가능했다. 멀리서 사는 딸 둘과 아들은, 이번에는 모이지 말고 다음 기회로 미루자는 우리 부부의 만류에도 그럴 수는 없다고 우긴다. 유치원에서 5학년까지 다섯 명의 손주와 자식들을 만나는 일이 반갑지 않을 리 없지만, 대식구의 식사 준비가 만만치 않으니 더럭 걱정부터 앞섰다.

47년간 대가족의 맏며느리로 매해 다섯 번의 제사와 명절, 생신, 두 분 어른의 회갑과 칠순, 시동생 시누이의 결혼… 아이들의 백일 돌잔치... 외식문화가 없던 시절, 수많은 행사는 먹는 일로 시작해 먹는 일로 끝이 났다. 시어머니 돌아가시고 삼 년. 이제 그 많던 일도 끝이 났다. 언제나 그 모든 일의 구심은 내 몫이었기에 새 달력이 나오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집안 행사를 달력에다 메모하는 일이었다. 집안 대소사에 세 남매 기르며 그저 그게 사는 일이거니 앞만 보고 달려온 시간이 47년이었다. 시부모님 두 분은 아흔둘, 아흔하나로 세상을 떠나셨다. 내 나이 예순일곱에 비로소 안주인이 된 것이다.

1974년 4월 11일. 스물넷의 신부는 사범대학를 졸업하고 단 일 년, 교단에서 학생들 가르치다 결혼과 동시에 대가족의 맏며느리가 되었다. 자그마한 사업을 하고 있던 시댁에는 부모님과 우리 부부, 시누이, 고등학생 막내 시동생과 합숙하던 종업원까지 많을 때는 열세 명의 식구가 있었다. 가업을 돕는 시어머니를 대신해 맏며느리인 내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는 대식구의 식사 준비였다. 도와주는 언니가 있었지만, 번거로운 집안일에 자주 사람이 바뀌었다. 명절에 고향에 다니러 갔다 온다는 언니들은 소식도 없이 돌아오지 않기 일쑤였다. 그해 초겨울, 김장하기 위해 시어머님이 배추를 사서 수돗가에 부려 놓으셨다. 오십 포기의 배추를 쪼개 언 손을 뜨거운 물바가지에 넣어 녹여가며 쪼그리고 앉아 배추를 절이고 일어서는데 아랫배가 뭉클하며 하혈이 있었다. 첫 아이의 유산이었다. 그렇게 통과의례를 치르며 딸에서 며느리로 정체성이 바뀌어 갔다.

시댁의 가풍은 소박한 가정에서 조촐하게 살던 친정과는 아주 달랐다. 아버님 두 형제분이 무척이나 가까이 지내셨다. 규모가 큰 사업을 하시던 큰댁은 드나드는 사람들로 붐볐다. 대청마루 앞에는 늘 신발이 그득했다. 일 년이면 다섯 번의 제사와 설 추석 차례에 큰아버님의 생신까지 대소가의 가족이 모이는 행사가 잦았다. 큰일이 있을 때면 큰댁 동서 다섯에 작은집 며느리인 나까지 모두 여섯의 며느리들은 부엌에 함께 모여 음식 준비로 북새통을 이뤘다. 삼사십 명의 식사를 준비하는 일은 아무리 손이 많아도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큰형님의 진두지휘 아래 해결사 둘째 형님, 묵묵한 셋째 동서, 애교 넘치는 넷째, 늘씬하고 쿨한 막내. 일 년이면 열 번 가까이 만나 함께 부대끼던 사촌 동서들은 친자매보다 가까운 사이였다.

키 높은 제상에 차려지던 제수들은 음복이 끝나고 둘러친 병풍이 걷히면 주방으로 들어온다. 동서들은 각자 밥과 국을 퍼 나르고 음식을 내간다. 젊은이들은 왁자하게 대청마루에 차려진 상에 둘러앉고, 남자 어른들은 사랑방에, 큰어머님과 어머님, 고모님은 안방 차지다. 주방 식탁에서는 동서들이 둘러앉아 허겁지겁 밥을 먹는다. 종일 음식하고 상 차려내고 치우고 먹는 밥은 꿀맛이다. 음식들과 제기들이 제자리로 찾아들고, 대청마루에 걸레질이라도 할라치면 어린 녀석들은 아랫목 할머니 옆에 웅크리고 잠이 든다. 앞치마와 외투를 챙기고 잠이 든 녀석들을 둘러업고 집으로 돌아가면 머지않아 부우웅하고 통금 사이렌이 울렸다. 한밤중에 지내던 제사는 차츰 초저녁 제사로 바뀌었다. 1993년 뜰앞에 모란이 흐드러지던 봄날, 일흔아홉의 나이로 큰아버님이 세상을 뜨셨다. 아버님은 다섯 위의 제사를 우리 집에서 모시자 하셨다. 젊은이들은 중년이 되었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사촌 형제도 있고, 세상을 떠난 분도 있으며, 남아 있는 이들도 각자 살아가는 일에 골몰했다. 제사는 우리 가족만의 일이 되었다. 지금은 시어른 두 분 제사와 명절 차례만 아들네 가족과 지내고 있다. 평생을 해오던 일들이 이제는 힘에 부치기 시작한다.

뜻하지 않게 찾아온 코로나 대유행은 모든 걸 바꿔 놓았다. 주말도 없이 늘 일에 치여 살던 아들은 비로소 퇴근 시간과 주말을 찾았다고 환하다. 그 행복한 여가에 유튜브로 요리를 배워 특식을 마련해 들고 오거나, 아예 집으로 초대해서 함께 요리를 즐기기도 했다. 엄마 칠순에도 음식 걱정하지 말라고, 자기가 다 책임진다고 큰소리다. 주말 오후 멀리서 딸네 가족들이 들이닥쳤다. 꽃바구니, 비누 화환, 풍선에 플래카드까지 유리창에 나붙고, 손주들은 준비해 온 수성펜을 들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유리창은 삽시간에 커다란 공연 무대가 되었다. 딸과 며느리는 식탁을 차리고 오늘의 쉐프 아들은 보랭 백에서 식재료들을 꺼내놓고 코스 요리를 시작했다. 오래된 식탁엔 여덟 식구의 자리가 마련되고 손주들을 위해 거실에 따로 상이 펼쳐졌다. 먼저 집에서 만들어 공수해 온 단호박 수프가 나오고, 야채 샐러드에 다양한 연어 요리의 변주가 시작됐다. 그동안 제철 가리비가 찜통에서 쪄지고 ‘감바스 알 아히요’와 ‘알리오 올리오’란 이름조차 현란한 파스타가 등장하고 식탁에서는 온갖 감탄과 품평과 웃음이 오갔다. 케이크과 꽃바구니, 비누 화환에 둘러싸여 고깔모자까지 쓴 할머니가 너무 귀엽다고 온 가족이 놀려댔다. 우렁찬 생일축하 노래와 박수가 터지고 손주들의 공연이 시작된다. 유튜브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며 현란한 개인기가 펼쳐졌다. 오랜만에 온 가족이 함께 모여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고 웃고 떠들며 맘껏 놀아보는 이 시간, 이 평범한 일상의 시간이 축복처럼 느껴졌다. 바쁘고 힘들다는 핑계로 음식점에 모여 맛있는 식사로 행사를 치르는 것도 근사하지만, 이렇게 온 식구가 용광로처럼 끓어 넘쳐보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지 모르겠다. 남녀가 유별하다고 늘 말씀하시던 시아버님이 이 장면을 보시더라도 "마 다 괜찮다"하고 함박웃음 지으셨을까.

생전 처음 맞아보는 팬데믹이라는 세상의 봉인 과정을 거치며 일상은 무너지고 때로 거꾸로 가기도 하는가 보았다. 시어른들이 그토록 귀해 하던 아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요리해다 나르고 오늘의 행사를 주도해 나가야 할 며느리는 시누이들과 육아와 세태에 대한 수다에 정신이 팔려 주방의 2인자가 되었다. 오래된 위계질서가 무너지고 잠깐 혼돈과 무질서가 지나가자 그 자리가 뜻밖의 ‘축제의 장’이 되었다. 대소가 며느리들이 한복 입고 큰절하던 시대가 지나고 K-팝에 빠진 손주 녀석들이 자발적으로 풀어내는 즉석 공연에 모두가 열광했다. 열 맞춰 찍던 기념사진 대신 스마트폰이 매 순간을 잡아냈다. 한 시대가 저물고 새 물결이 넘실댔다. 다만 새로운 시간에 저항 없이 흘러드는 일만이 우리들의 필살기일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