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72)봄바람은 논둑을 넘어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72)봄바람은 논둑을 넘어
  • 정재용 기자
  • 승인 2023.03.09 09:47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논둑은 논의 경계, 물을 가두는 둑, 들길
봄바람에 생기 돌아

정월대보름 지나고 나면 누렇던 들판은 검은 색으로 변해 있었다. 불놀이 때문이었다. 텔레비전도 병해충 없애는 방법으로 장려했다. 논둑을 타고 번지던 불길이 센바람에 불티를 날려 논 한 도가리(블록)를 뛰 넘는 것은 순간이었다. 산이 멀어서 산불 낼 일은 없지만 마을에 초가와 짚 볏가리가 많아서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봄볕에 여자애들은 고무줄놀이를 했다. 그냥 ‘고무줄하다’로 불렀다. 팔짝팔짝 뛰어 오를 때마다 단발머리가 춤을 췄다. 까만 고무줄을 종아리에 걸고, 휘감고, 풀고, 돌리고, 타넘고, 쳐들고 정신이 없었다. 가끔 땅을 짚고, 물구나무서기로 넘고, 뒤로 돌았다. 그때 부르는 노래 중의 하나가 ‘승리의 노래’(1951)였다.

“무찌르자 오랑캐 몇 백만이냐/ 대한 남아 가는데 초개로구나/ 나아가자 나아가 승리의 길로/ 나아가자 나아가 승리의 길로” [이선근 작사 권태호 작곡, 군가]

초개(草芥)란 풀과 지푸라기를 뜻한다. 혀를 널름거리며 타는 불꽃에 논둑의 마른 풀은 맛있는 먹잇감이었다. 1919년 2월 1일 간행 ‘창조’ 창간호에 실린 주요한(1900~1979)의 산문시 ‘불놀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자유시로 유명하다.

“아아 날이 저문다, 서편 하늘에, 외로운 江물 위에, 스러져 가는 분홍빛 놀…… 아아 해가 저물면 해가 저물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만은, 오늘은 四月이라 파일날, 큰길을 물밀어 가는 사람소리는 듣기만 하여도 흥성스러운 것을 왜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없는고?// 아아, 춤을 춘다, 춤을 춘다, 시뻘건 불덩이가, 춤을 춘다.”로 이어진다. 여기에 등장하는 강은 대동강이다.

마을 주위의 논둑, 개울둑, 개울바닥을 훑으며 불덩이가 춤을 추듯 지나갔다. 그 뒤로 연기가 초연(硝煙)처럼 피어오르고 불이 지나간 자리에는 새까맣게 그을린 논둑이 잔해를 드러냈다. 억새 줄기가 검은 바늘을 꽂아놓은 듯 빼곡하고 제비꽃, 광대나물, 민들레, 쑥은 잔뜩 웅크려있었다.

눈은 3월에도 내렸다. 눈이 내린 들판은 다시 마술처럼 검정에서 하양으로 변신했다. 함박눈은 화상(火傷)을 입은 논둑과 벼 베기로 자상(刺傷)을 입은 벼 그루터기를 어루만졌다. 시퍼렇게 언 보리의 솜이불도 됐다.

봄비가 잦아지면서 논둑은 푸르러 갔다. 눈 덮인 들판이 수묵화라면 연푸른 들판은 한 폭의 동양화였다. 농부는 아이들이 불놀이하면서 태워먹거나 무논에 썩은 나무말뚝을 새것으로 교체했다. 말뚝을 박아 놓으면 아래 논 주인이 쟁기질을 논둑 깊숙이 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논둑이 새거나 터지면 물이 빠지기 때문에 아래 둑을 제 논둑으로 삼았다. 비료를 뿌린 물이 새거나 논둑이 터지면 큰일이었다.

바가리 쳤던 논둑은 쥐들이 뚫어 놓은 구멍이 여러 개 있었다. 두더지, 땅강아지, 뱀, 도마뱀, 지렁이, 드렁허리, 거미, 개미 등이 논둑에 구멍을 파고 살았다. 양동산에서 내려온 솔개가 하늘 높이 빙빙 돌며 들쥐를 노렸다. 벼메뚜기와 풀벌레 알은 논둑 흙속에서 겨울을 났다.

보리를 갈지 않는 고래전 논에는 우렁이와 미꾸라지는 논바닥 깊숙이 파고들어 새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괭이로 수생식물인 가래와 마름이 말라 있는 흔적을 캐면 ‘올비’가 나왔다. 완두콩 크기의 까만 열매인데 엄지손톱으로 까서 하얀 부분을 씹으면 오도독 소리만큼이나 고소한 맛에 행복했다.

물이 나는 고래전을 제외한 다른 논에는 모두 보리나 밀을 갈았다. 논둑의 풀은 누렇게 말라도 보리는 싱싱했다. 가뭄과 추위에 죽기도 했지만 멀리서 보면 파랬다. 서릿발에 말라 죽고 기러기와 까마귀가 내려앉아 뿌리를 파먹었다.

왼쪽으로 어래산 오른쪽으로 양동산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왼쪽으로 어래산 오른쪽으로 양동산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농부는 집안에 결혼식이 있어 고향인 경주 신당(神堂)마을로 갔다가 소죽 끓이는데 늦지 않게 일찍 집으로 향했다. 청령역에서 열차를 타기로 했다. 둔전에서 안강으로 가는 버스가 있지만 자주 없는 데다 값싸고 정해진 시각에 출발하는 열차가 맘에 들었다. 그는 형산강 얕은 데를 알고 있었다. 강물은 차디찼다.

청령역은 간이역이었다. 사방역을 지나 안강역에 내렸다. 농부는 마을을 겨냥해서 소달구지 다니는 길을 걷다가 논둑을 걷고 논둑에서 보리밭을 가로질렀다. 논둑은 농지 소유권의 경계이자 논물을 가두는 둑이고 길이었다. 북부리에 있는 동부정류소에서 버스를 타도되지만 온돈 내고 반(半)차 탈 이유가 없었다. 5분이 채 안 돼 흥덕왕릉 입구에서 내려 어차피 걸어야했기 때문이었다.

먼지가 바짓가랑이를 타고 뽀얗게 피어올랐다. 농부는 집에 도착해서 벗어 활활 털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어래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찼다. 조금 걸으니 땀이 나고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노래를 불렀다.

“내 고향 처녀들이 나를 좋아 하는데/ 하루에도 열두 번씩 가고 싶은 내 고향/ 에헤야 가다못가면 에헤야 쉬었다가세/ 모본단 치만 한 감 떠가지고 갑시다// 내 고향 친구들이 나를 불러주는데/ 하루에도 열두 번 씩 가고 싶은 내 고향/ 에헤야 가다 못 가면 에헤야 쉬었다 가세/ 호박 같이 둥근 세상 웅글둥글 삽시다” [김운하 작사, 김광 작곡, 최희준 노래 ‘병사의 향수’(1966) 개사]

“청춘은 봄이요 봄은 꿈나라/ 언제나 즐거운 노래를 부릅시다/ 진달래가 생긋 웃는 봄봄/ 청춘은 싱글벙글 윙크하는 봄봄봄/ 가슴은 두근두근 청춘의 꿈/ 산들산들 봄바람이 춤을 추는 봄봄/ 시냇가에 버들피리는 삐리삐리삐/ 라랄라라 라랄라라 라라랄 랄 라라랄 라라랄 랄 닐리리 봄봄/ 청춘은 봄이요 봄은 꿈나라” [추미림 작사, 김용대 작곡, 김용만 노래 ‘청춘의 꿈’(1947)]

앞거랑에는 안강-기계 도로 다리 밑을 지나 큰거랑에 이르기까지 시멘트로 만든 3개의 다리와 3개의 관개(灌漑)시설이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다리를 ‘공굴’, 관계시설을 ‘수문’(水門)이라고 불렀다. 흙이나 송판(松板)으로 막아 고래전에 물을 댔다. 농부는 거의 말라 있는 수문 바닥을 걸어 앞거랑을 건넜다. 건너면서 안강들은 끝나고 고래전, 한들, 모래골이 시작됐다. 경지정리는 안강들만 돼 있었다.

시인 이상화(1901~1943)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논둑을 두고 ‘가르마 같은 논길’이라 했으나 벼가 없는 고래전 논둑은 내복 솔기처럼 도드라져 여러 모양으로 구불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