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71)또 한 해가 저물고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71)또 한 해가 저물고
  • 정재용 기자
  • 승인 2022.12.21 13:1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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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초 탈곡을 마치고 추수감사절 지켜
동지 지나면 새해는 금방

탈곡은 늦으면 12월 초순까지 갔다. 소평교회는 탈곡에 맞춰 12월 첫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켰다. “넓은 들에 익은 곡식 황금물결 뒤치며” 566장 ‘추수 찬송’을 신나게 불렀다. 초가삼간 헐어 지은 예배당에 감사가 넘쳐났다.

추수감사헌금은 현물로 했다.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말씀 그대로 각자 형편에 맞게 했다. “백미 두 가마” 세렝게티(Serengeti) 강을 건너는 누 떼처럼 자타가 공인하는 ‘묵은 디이’(묵은 둥이) 집사가 먼저 운을 떼자 연이어 작정(作定)을 하기 시작했다. 젊은 집사 한 사람이 앞으로 나가서 칠판에 적었다. 한 말, 한 되를 해도 거리낄 게 없었다. 곡수가 많이 나는 해는 많이 하고 적게 나는 해는 적게 했다. ‘방아를 찧는 대로 헌금하겠다’는 의사표시를 ‘작정 하다’라고 했다.

예배를 마치면 각 가정에서 준비해 온 음식을 예배당 마룻바닥에 펼쳤다. 그때는 어느 교회할 것 없이 마룻바닥에 ‘자부동’(방석)을 깔고 앉아 예배를 드렸다. 오늘날처럼 의자에 앉아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죄인이 감히 의자에 앉다니’ 불경(不敬) 그대로였다. 의자는 설교자나 대표기도 하는 이가 잠시 앉기 위해서 강단 위에 놓인 몇 개가 전부였다. 교인들은 양반다리를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여성들은 두 다리를 옆으로 모아 앉기도 했다. 그러다가 기도시간에는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이는 도시 교회가 시골 교회나, 큰 교회나 작은 교회나 마찬가지였다.

여느 해처럼 감주 하는 집은 감주하고 떡 하는 집은 떡을 했다. 감, 곶감, 사과, 감주, 고구마, 엿, 본편, 절편, 찰떡, 약밥 등 없는 게 없었다. 낮이 먹는 잔치라면 저녁예배 때는 발표회 잔치였다. 어린이들이 나와서 노래, 무용, 요절 암송 등의 추수감사 발표를 했다. 가족창을 할 때도 있었다.

어래산 너머로 해가 지고 있다. 정재용 기자
어래산 너머로 해가 지고 있다. 정재용 기자

찬바람이 불다가 바람이 없는 날은 서리가 내렸다. 서리는 초가지붕, 거름더미, 논바닥, 벼를 베고 남은 밑동, 마른 풀잎, 말라가는 호박넝쿨 할 것 없이 온 천지에 내려 햇살에 반짝였다. 덕석을 벗겨낸 소등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이엉을 엮던 농부가 부엌으로 달려 들어가 가마솥에 손을 녹였다.

농부는 갱빈 밭의 무가 얼까 노심초사했다. 서리 맞은 무, 배추는 채독(菜毒) 걱정이 없었다. 무생채를 하고 배춧잎을 된장에 찍어 먹었다. 무국, 무 된장찌개, 배추 겉절이, 삶은 배추쌈 등 밥상은 무 배추 일색이었다. 리어카가 나오기 전까지는 무 배추를 소달구지나 지게로 날랐다.

간간이 눈이 내렸다. 어래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살을 에는 듯 찼다. 맞바람을 뚫고 북북 학교로 가는 꼬마의 손등이 트고 볼은 발갛게 얼었다. “바람이 떠르르 불기 전에 김장해 얄 텐데” 김장 걱정을 했다. 찬바람을 두고 곧잘 “떠르르 분다”라고 했다. 문풍지 떨 때 내는 소리였다.

“동지 안에 집청(조청) 해 먹으면 약이 된다”는 말이 있었다. “기침에 수수조청이 좋다”고 했다. 농부의 아내는 천식 기침하는 남편을 위해 해마다 수수조청을 고우고 거기에 몸에 좋다는 들깨를 방앗간에 가서 타다 버무렸다. 농부의 아들은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수시로 몰래 한 숟갈씩 훔쳐 먹었다. 조청은 약으로 쓴다고 아이들에게는 맛만 보여주고 주로 엿밥을 먹였다. 엿밥은 엿을 짜고 난 찌꺼기다. 술지게미를 먹을 때처럼 사카린을 버무려 간식으로 먹었다.

숫기가 없어 쭈뼛쭈뼛하는 것을 “삐주구리 하다” 하고 나잇값 못하거나 멋없게 구는 사람을 두고 “삐주구리 엿밥 같다” 조롱했다. 옛날에는 “등신”, “쪼다” 같은 말을 예사롭게 썼다.

마을에 삐주구리 엿밥 같은 사람 몇이 있었다. 그들은 겨우내 마을 입구 ‘점빵’(店房)에 틀어박혀 화투노름을 했다. “○○가 비료 값을 날려 내년 농사를 망치게 생겼다”는 소문이 돌았다. 비료는 반장에게 주문해 놓고 기다리다가 납부통지가 오면 반드시 기한 내 대금을 납부하게 돼 있었다.

아낙이 아들을 점빵으로 보냈다. 아들이 문 밖에서 말했다. “아버지, 저녁 잡수러 오시래요” 문이 잠시 열렸다. “알았다. 곧 간다. 먼저 먹고 있어라.” 따라 나올 리가 만무했다. 분을 삭이지 못한 아낙이 달려가서 방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그들을 노려보며 가쁜 숨을 씩씩거렸다.

“어디라고 찾아와서 끗발 다 죽이고” 노름꾼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밥상을 냅다 마당으로 던졌다. 그러고도 화가 덜 풀리는지 노름꾼은 울매를 찾아 들고 장독대로 가서 간장독을 내리쳤다. 독이 터지며 천둥소리를 냈다. “날 죽여라!” 아낙의 앙칼진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는 금방 “꺼억, 꺼억” 숨을 몰아쉬는 신음으로 바뀌었다. 멱살이 잡힌 모양이었다. 어린아이 우는 소리가 자지러졌다.

싸움을 시작할 때부터 담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있던 이웃들은 근심어린 얼굴로 쑥덕거렸다. “기절한 거 아니가?”, “목 조르는 갑다(같다)” “저러다가 정말 죽이겠다”, “부부싸움에 함부로 끼어드는 게 아니여”

어느 독한 삐주구리 엿밥은 새끼 꼴 짚을 놓고 울매로 두드릴 때 바탕이 되는 돌덩이를 두 손으로 번쩍 들어 참솥 밑구멍을 뺐다. 장롱을 부수는 집도 있었다.

마을 어귀의 ‘점빵’ 집. 정재용 기자
마을 어귀의 ‘점빵’ 집. 정재용 기자

박경리(1926~2008)의 소설 ‘토지’를 각색한 연속극 ‘土地’에서 용이는 아내 강청댁을 두고 몰래 무당의 딸 월선이를 만난다. 이를 눈치챈 강청댁이 “고마 살림 확 뽀사뿌고 끝내자” 앙살을 부린다. 강청댁이 죽자 임이네가 아내로 들어온다. 임이네도 같은 말로 패악질을 한다. 소평마을에 용이처럼 남편이 바람을 피워 살림을 부수는 집은 없었다.

이튿날 노름꾼의 아내는 물동이를 이고 우물터로 물을 길러 나왔다. 손에는 날달걀이 들려 있었다. 멍 삭히는 데 최고라고 했다. 그의 남편이 종종 앞니로 양쪽에 구멍을 뚫어 쪽쪽 빨아먹던 달걀이었다. 집청을 고운 그 해는 동지팥죽을 안 끓였다. 가난한 살림에 두 가지 다 해 먹기는 벅찼다.

12월 31일 밤 텔레비전은 남녀 가수들이 나와 청백전을 벌이고 자정에는 보신각에서 제야의 종을 울렸다. 그렇게 또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저물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