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70)소 힘줄보다 끈질긴 가난의 굴레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70)소 힘줄보다 끈질긴 가난의 굴레
  • 정재용 기자
  • 승인 2022.11.21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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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리 곰배치기 농사에
허탈감 술로 달래

농부는 탈곡한 벼를 마당에 똑 같은 두지(斗庋, 뒤주) 두 곳에 갈무리했다. 하나는 지주(地主) 몫이었고 하나는 자신의 것이었다. 두지는 가마니를 둘러 원통을 만들고 지붕은 짚으로 고깔을 만들어 덮었다.

두지 속이 쥐 방구리가 안 되도록 하려면 하루라도 빨리 가마니를 쳐야 했다. 농부는 낮에는 보리를 갈고 밤에는 가마니틀에 꿸 새끼를 꼬아 가마니를 쳤다. 가마니 20여 장을 치고 나면 농부의 손은 걸레가 됐다. 찢어지고 갈라져서 피멍울이 들었다. 지주 두지를 먼저 헐어 읍내 정미소에 맡기고 나서 다시 가마니 치기를 시작했다. 자신의 벼를 담을 가마니였다. 지주 것 털어주고 나면 눈치 볼 것도 없었다. 놀아가면서 쉬엄쉬엄 치기로 했다. 쥐는 쥐틀을 놓아 잡으면 됐다.

보리갈이가 끝나면 김장을 하고, 김장을 마치면 메주 쒀서 처마에 달았다. 겨울로 가는 길목에서 해는 짧고 밤이면 기온은 한 자릿수로 내려갔다. 날이 빨리 어두워지는 만큼 저녁을 일찍 먹었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 정재용 기자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 정재용 기자

햅쌀밥은 꿀맛이었다. 반찬이 필요 없었다. 하지만 이는 맛맛으로 먹는 게지 바로 시래기죽 또는 보리밥으로 돌아갔다. 짚신장수 헌 짚신 신고 갓 장수 헌 갓 쓰는 격이었다. 돈 나올 데는 쌀밖에 없었다. 찰밥은 생일날 아침에 먹었다.

농부는 덜 춥기 전에 초가집을 새로 이어야 했기에 낮에는 양지바른 곳에 앉아 이엉을 엮고 밤에는 새끼를 꼬았다. 가마니 새끼보다 두세 배 굵기였다. 굵을수록 지붕을 튼튼히 묶을 수 있었다.

시래기죽은 일찍 배가 꺼졌다. 농부는 새끼를 꼬고 아이들은 보릿짚을 땋다가 남은 죽을 먹었다. 식은 죽 먹기였다. 밤참이 없으면 허전했다. 그러므로 농촌의 저녁은 언제나 양은냄비 그득했다. ‘없는 집에 양식 들어가듯’, ‘밥이 모자랄 성 싶으면 더 달려든다’는 격언이 있었다.

농부는 비록 죽이지만 식구들이 배불리 먹고 뜨뜻한 방안에서 겨울을 날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했다. 판소리 단가(短歌)의 “나물 먹고 물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넉넉한가(족하다)”를 떠 올렸다. 논어(論語) 술이(述而)편에 이 같은 구절이 있다. “거친 밥을 먹고 맹물을 마시며 팔을 굽혀 베개 삼아 누워 있을지라도 도에 뜻을 둔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으니, 부정과 불의로 얻은 부귀영화 따위는 내게는 저 하늘에 뜬 구름과 같다”

추수하기를 기다렸다는 듯 각종 청구서가 농부네 집으로 날아들었다. 밀린 비료 값, 농약 값, 외상값, 돈 빌린 것, 이발소 모곡(耗穀), 농지세, 수세, 경조사 부조(扶助)가 늘어서서 돈을 내 놓으라고 했다. 학교에 갔던 아이가 공납금 납부기한 넘겼다고 수업을 하다말고 쫓겨 왔다. 중학생 아들의 운동화가 너덜거린 지 한 장(場)이 넘었다. 농부는 갑자기 밀려오는 치통에 얼굴을 찡그렸다.

농부는 웃음을 잃었다. 그리고 어쩌면 가난을 대물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전율했다. 연줄 끊긴 연이 양동산을 향해 달아나듯 가족들의 웃는 얼굴이 멀어져가는 느낌이었다. ‘호강시켜 달라는 것도 아닌데 그냥 소박하게 살기를 원하는데’ 그 작은 꿈을 지켜주지 못 하는 자신이 미웠다.

가난의 족쇄는 천형(天刑) 같았다. 아득했다. 농부가 신음하듯 말했다. “이 노무(놈의) 농사, 평생 지(제)자리 곰배(곰방메)치기다” 게이트볼 채 모양의 나무로 만든 농기구를 ‘곰배’라고 불렀다. 보리갈이를 하려면 곰배를 휘둘러 흙덩이를 깨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제자리에서 그러고 있으니 하나마나였다.

농부는 술을 마셨다. 일하면서 마시고, 초상집에 가서 마시고, 잔칫집에 가서 마시고, 서러워서 마시고, 기뻐서 마셨다. “사람이 술을 마시고 술이 술을 마시다가 술이 사람을 마신다”, “밥은 바빠서 못 먹고 죽은 죽어도 못 먹고 술은 술술 넘어 간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지켜보던 노모가 “조선 망하고 모자라 대국 망할 놈”이라 꾸짖었으나 들은 체 만 체였다.

금주가. 정재용 기자
금주가. 정재용 기자

큰거랑 빨래터는 농부들의 술주정 얘기가 만발했다. 술집에서 집으로 가다가 길바닥에 뻗어 자고, 자다가 봉창 두드린다고 남의 집 방문 두드리고, 오줌이 마려 발치에 자는 사람의 머리통을 요강인양 잡아 갈기고, 장롱 상단의 ‘빼닫이’(서랍)를 빼내 누고, 시장에서 돌아오는 길 ‘톳재비’(도깨비)에 홀려 밤새 논길을 헤매고… 얘깃거리는 물 위에 떠내려가는 거품만큼이나 풍부했다.

이 무렵 재단법인 대한기독교서회, 1968년 12월 5일 초판발행, 1977년 4월 20일 23판 발행 ‘찬송가’에는 ‘금주가’가 실려 있었다. 486장 Bessic Im 작사 작곡이었다. 아내의 강권에 못 이겨 교회에 나온 농부는 눈으로 따라 읽었다.

“1 금수강산 내 동포여 술을 입에 대지 말아/ 건강 지력 손상하니 천치 될까 늘 두렵다/ (후렴) 아 마시지 말라 그 술 아 보지도 말라 그 술/ 우리나라 복 받기는 금주함에 있느니라// 2 패가망신 될 독주는 빚도 내서 마시면서/ 자녀교육 위하여는 일 전 한 푼 안 쓰려네// 3 전국 술값 다 합하여 곳곳마다 학교 세워/ 자녀 수양 늘 시키면 동서 문명 잘 빛내리// 4 천부 주신 네 재능과 부모님께 받은 귀체/ 술의 독기 받지 말고 국가 위해 일 할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