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68)맹물로 쌀을 만들다니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68)맹물로 쌀을 만들다니
  • 정재용 기자
  • 승인 2022.09.21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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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는 뜨뜻미지근한 논물을 빨아올리고
길 가던 소는 그 물로 목 축여

곡식의 이삭이 나오는 것을 ‘패다’라고 한다. 벼 품종은 이삭 패는 시기에 따라 조생종(早生種), 중생종(中生種), 만생종(晩生種)으로 구분된다. 조생종은 7월 중순, 중생종은 8월 초순, 만생종 8월 중순 경에 팬다. 마을사람들은 어려운 한자말보다 알아듣기 쉽게 조, 중생종은 올벼, 만생종은 늦벼로 불렀다.

모내기는 언제나 겨울이 빨리 오는 북쪽에서 먼저 시작해서 차차 차차 남쪽으로 내려왔다. 벚꽃 피는 것과 반대로 생각하면 된다. 대부분 2모작을 하는 안강 들판은 늦벼였다. 보리를 거두고 모내기를 하고, 정부에서 하는 추곡수매도 거기에 맞춰 하기 때문이었다. 혹 추석 전에 수확하기 위해 올벼를 심는 집도 있었다.

옥수수 하나에 수염이 몇 개인지는 옥수수 낟알을 세보면 된다. 옥수수는 맨 꼭대기에 수꽃이 피고 그 아래로 줄기 따라 옥수수가 달리는데 그 옥수수는 암술을 밖으로 내밀어 바람이 불 때마다 위에서 떨어지는 꽃가루로 정받이를 한다. 벼꽃도 옥수수와 같은 풍매화(風媒花)다.

광복절 무렵 만생종 벼꽃이 피었다. 안강들 멀리 양동산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광복절 무렵 만생종 벼꽃이 피었다. 안강들 멀리 양동산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벼는 벼 포기 하나에 이삭 하나를 패고 이삭은 낟알을 촘촘히 맺는다. 이 낟알 하나하나가 정받이를 해야 쭉정이가 되지 않는다. 벼는 옥수수와 달리 낟알마다 암술과 수술이 핀다. 암술 하나를 가운데 두고 수술 6개가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다. 벼꽃은 흰색이다. 벌 나비를 부를 일이 없는 만큼 향기가 없고, 돌잔치 떡으로 유명한 ‘백짐’(백설기) 먹다가 흘린 부스러기 같았다. 그것도 나흘 정도 피었다가 져서 게으른 농부는 벼꽃이 언제 핀 줄도 몰랐다.

이때까지 농부가 땀을 흘린 것은 벼를 조금이라도 포기를 더 벌리려는 노력이었다. 포기 수가 많을수록 이삭도 많고, 이삭이 많은 만큼 낟알도 많이 마련이었다. 같은 면적에 같은 농사를 지어도 곡수는 달랐다. 현명한 농부는 비료나 농약 쳐야할 때와 적당한 양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부지런히 김을 매고 물을 댔다. 이삭이 패고부터 중요한 일은 논에 물대기였다.

짙푸른 벼 줄기는 논물을 맘껏 빨아올려 쌀을 만들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하듯 벼의 쭉정이 안에 담긴 맹물은 쌀 물로 변했다. 미음을 만들 때 쌀을 갈면 맷돌 아래로 뽀얗게 흐르던 그런 쌀 물이었다.

낟알은 날로 통통해지고 벼이삭은 서서히 고개를 숙였다. 통통한 낟알을 따서 엄지와 검지 사이에 두고 눌러보면 껍질이 터져 “찍” 소리와 함께 쌀 물이 흘렀다. 쌀 물이 가득차면 물기는 갇아지고 따끈한 햇살에 여물어 갔다. 물기가 빠지면서 굳어지는 것을 ‘갇아지다’라고 했다.

무논에 사는 생물들도 살이 쪄 갔다. 참개구리가 힘차게 뛰어올라 벼 잎에 붙은 나방을 덥석 물었다. 유혈목이가 개구리를 노렸다. 논둑을 걸으면 논두렁콩은 통통하고, 벼 잎을 갉아먹던 벼메뚜기가 황급히 달아나고 미꾸라지 도망치는 소리가 들렸다. 우렁이를 까먹던 백로가 창공으로 날아올랐다.

갱빈(강변)에서 풀을 뜯고 집을 향해 가던 소는 걸음을 멈추고 논물을 들이켰다. 물속에서 헤엄치던 물벼룩, 붉은 실밥 같은 물벌레가 휩쓸려 들어갔다. 어미 소가 물을 마시는 것도 모르고 다른 소를 따라 가던 송아지가 어미 찾아 울며 되돌아섰다.

초가을 햇살은 따가웠다. 낮은 덥고 조석(朝夕)은 긴소매 옷을 입어도 쌀쌀했다. 농부의 아내는 언제 ‘한이불’(핫이불) 내릴 지를 저울질했다.

이따금 형산강 쪽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벼들이 일제히 허리 굽혔다. 파도타기를 하는 것 같았다. 농부의 밀짚모자가 날아가 논으로 떨어졌다. 소풀 망태 이고 논두렁길을 걷는 소녀의 꽃무늬 치마가 펄럭였다. 소년은 다른 데로 고개를 돌렸다.

농부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혹시 논둑이 터진 데는 없는지 돌아보고, 적당한 때 뿌리를 튼튼하게 하는 칼리 비료를 뿌렸다.

농부는 식구들 군것질거리로 ‘칠평’ 과수원으로 가서 풋사과를 비료포대 한가득 사왔다. 벌레 먹거나 썩어 들어가는 국광이었다. 풋사과라서 떫고 ‘새그러웠지만’(시었지만) 맛있게 먹고 껍질은 토끼장에 넣었다. 토끼는 더 맛있게 먹었다.

당시 널리 알려진 사과는 국광, 홍옥, 인도였다. 빨갛게 익은 홍옥을 한입 깨물면 얇은 껍질 터지는 상쾌한 소리와 함께 달콤새콤한 과즙이 입안에 가득했다. 인도는 껍질이 두껍고 익어도 파란 빛깔이었다. 터벅터벅하나 단맛이 일품이었다. 국광은 서리를 맞아야 제맛을 냈다.

소평마을에 단골로 물건을 팔러 들어오는 ‘아지매’가 있었다. 그는 철따라 자두, 복숭아, 참외, 사과, 포도 등을 머리에 이고 나무그늘 하나 없는 5리 길을 걸어 왔다. 더운 날에, ‘반티’(함지) 또는 ‘다라이’(큰 고무대야)를 이고 와서는 대금으로 보리쌀이나 밀을 받아갔다. 농촌에서 현금은 귀했다.

입대했더니 이런 아주머니들을 ‘이동주부’(移動主婦)라고 불렀다. 이동주부는 훈련병들이 야외훈련을 나가면 따라가 ‘10분간 휴식’ 시간에 빵, 우유, 과자, 볼펜, 편지지, 담배 등을 팔았다.

지난 8월 4일 안강들, 조생종 벼는 벌써 고개를 숙였다. 정종한 씨 제공
지난 8월 4일 안강들, 조생종 벼는 벌써 고개를 숙였다. 정종한 씨 제공

과일 철은 잠깐이고 주로 반찬거리였다. 죽도시장에서 떼 온 것으로 보이는 양미리, 멸치, 오징어, 곱빠리, 꽁치, 가자미, 고등어, 갈치 등 생선과 미역, 다시마, 모자반, 파래 등 해조류였다. 가끔 함석 물통에 젓갈을 담아 이고 들어왔다. 우물물을 길을 때 쓰는 원통형 물통이었다.

마을사람들은 젓갈을 ‘시케’(식혜, 食醯)라고 불렀다. 감주(甘酒)는 그냥 감주 또는 단술이라고 했다. 농부의 점심은 간단했다. 냉수에 보리밥 말아 먹기가 일쑤였다. 이때 쪽파 잘게 썰어 넣고 고춧가루 섞어 버무린 젓갈이 제격이었다.

한때 애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시케 국물이 모자라면 논물을 퍼 담는다”는 소문이었다. 눈에 보이는 게 논이고 논물 대는 게 일이다보니 장난도 그런 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