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66)논매기로 지샌 여름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66)논매기로 지샌 여름
  • 정재용 기자
  • 승인 2022.07.25 1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낮은 무더위 속 논매기, 밤은 모기로 죽을 맛
벼가 커가는 기쁨에 피곤 잊어

여름은 논매기의 계절이었다. 모내기 마쳤다고 채 기뻐할 겨를도 없이 논매기 때가 닥쳤다. 찌는 듯 한 무더위 속에 벼들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늘의 명령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기회는 찬스다’ 사방이 무논이라 모기도 맘껏 알을 낳고 새끼를 길렀다. 낮에 무더위 속 논매기로 지친 농부가 죽은 듯 쓰러져 자면 모기들은 밤새 파티를 벌였다. 여름밤은 사면문가(四面蚊歌, 모기들이 둘러싸고 부르는 노래)에 깊어갔다.

농부는 논매기로 날이 새고 날이 졌다.

햇살은 강렬했다. 반소매 남방셔츠에 드러난 맨살이 따가웠다. 햇살에 비하면 농부의 차림은 너무 허술했다. 포플린 토시에 밀짚모자 하나가 전부였다. 제초기를 ‘기계’(機械)라고 불렀다. 기계 두 개를 지게에 얹었다. 하나는 아내 것이었다. 아내는 설거지와 밀린 빨래를 마치는 대로 참을 들고 들로 나섰다.

논둑에 나와 있던 개구리가 황급히 논으로 뛰어 들었다. 논둑에는 논두렁콩이 강아지 귀 같은 이파리를 나풀거렸다. 논물은 적당했다. 물이 적으면 제초기 굴리는 데 힘이 들고 너무 많으면 제초가 잘 안 됐다. 복숭아씨 뼈에 찰방거릴 정도가 적당했다. 농부는 논매기 하루 전날 물을 빼서 조정했다.

논매기는 집집마다 거의 동시에 시작했다. 2014년 12월에 개봉한 영화 ‘국제시장’은 “인생은 타이밍”이란 대사를 유행시켰다. 농사야말로 타이밍이었다. 모판 만들기부터 논갈이, 모내기, 제초, 시비(施肥), 농약살포, 물대고 빼기, 추수까지 모든 게 때를 놓치면 안 되게 돼 있었다. “좌락, 좌락” 들판 전체가 제초기 굴러가는 소리로 가득 차더니 파란 하늘 위로 피어올랐다.

어래산 위로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큰거랑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정재용 기자
어래산 위로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큰거랑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정재용 기자

제초작업은 벼가 30cm 정도 자랐을 때가 적당했다. 너무 일찍 서두르면 제초기에 벼 뿌리를 상할 염려가 있고, 늦으면 수초가 뿌리를 깊이 내려 힘만 들고 풀도 잘 뽑히지 않았다. 그리고 제 때에 비료를 해야 하는데 아까운 비료를 수초에게 빼앗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논매기를 마치면 물을 다시 대고 비료를 뿌렸다.

제초기는 기다란 나무막대 끝에 T자로 손잡이를 만들고 땅에 닿는 부분에는 양철로 된 제초갈퀴를 단 것이었다. 바퀴는 세 부분으로 나눠졌는데 맨 앞은 유선형으로 생긴 빈곳으로 벼 포기 사이를 헤집고 빈곳은 물로 채워져 기계가 위로 들리지 않게 했다. 중간 바퀴는 쇠스랑 같은 갈퀴로 돼 있어서 수초를 찍고, 뒷바퀴는 끝이 약간 구부러진 철판 여러 개가 달려 있어서 수초를 진흙에 묻는 역할이었다.

멀리서 보면 푸른 들판에 작대기를 밀고 다니는 것 같았다. 벼가 짙푸른 색을 띠는 것은 활착했다는 증거였다. 부레옥잠, 물상추, 갈(가래), 남개연, 방두사니 따위의 수초가 통째로 진흙에 묻혔다. 수초 사이에 숨어 있던 게아재비, 물장군, 장구애비, 물방개, 물땡땡이, 거머리, 올챙이는 집을 잃었다. 참개구리가 개구리밥을 뒤집어쓴 채 머리를 내밀다가 달아났다. 개구리밥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큰거랑 가까이 있는 논에는 송사리, 붕어, 미꾸라지 같은 물고기가 많았다.

백로가 먹이를 찾아 날아들었다. 백로를 황새로 불렀다. 소평마을 북쪽 어래산 가까이에 ‘황새마을’이었다. 한문으로는 ‘학지’(鶴旨)였다. 황새마을과 소평마을 둘 다 행정구역상 ‘육통3리’였다. 초록 들판에 하얀 백로는 언뜻 보면 삼베적삼을 입은 농부가 엎드려 논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백로가 좋아하는 먹이는 개구리와 우렁이였다. 논둑에는 백로가 까놓은 우렁이 껍질이 여기저기 뒹굴었다. 백로의 “딱딱, 딱딱” 부리 부딪치는 소리가 마당까지 들렸다. 우렁이 까먹거나 의사소통을 위해 위아래 부리를 부딪치는 소리였다. 마을사람들은 뉘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 “황새 고디(우렁이) 까먹는 소리”로 일축했다.

참은 밀가루 수제비였다. 수건을 둘러 고깔로 썼던 아내가 수건을 벗어 땀을 닦았다. 새카만 얼굴이 드러났다. 고운 것을 ‘분(粉)을 따고 넣은 듯’, 검은 것을 ‘인도지이 같다’라고 말할 때가 있었다. ‘인도차이나 사람’이라는 뜻이다. 인도차이나(Indochina)를 ‘인도지나’라고 불렀다. 농부는 언제 ‘동동 구리무’(cream) 한 통을 사다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고마리 덤불 속으로 뱀 한 마리가 미끄러지듯 스르르 지나갔다. 개구리 있는 곳에는 뱀이 있기 마련이었다.

점심은 집으로 들어와서 먹었다. 점심상에 앉기 전에 가축부터 챙기는 것은 습관이었다. 외양간의 소에게 소죽을 퍼주고, 토끼장의 토끼에게 풀을 한 움큼씩 넣어주고, 밀 한 바가지를 떠서 마당에 뿌리며 “구구~” 잿간에 있는 닭을 불러냈다. 이를 보고 애들은 구구단을 외울 때 “구구 달구(닭)똥”이라고 했다. ‘뒤안깐’(뒤뜰)에서 나오던 검둥개가 만사가 귀찮다는 듯 힐끗 쳐다보고는 감나무 그늘로 가서 다시 누웠다. 그리고 ‘백호야 날 살려라’ 활개를 벌리고 잤다.

개의 이름은 ‘뿌구리’였다. 뒤로 보이는 벽에 영화가 상영됐다. 정재용 기자
개의 이름은 ‘뿌구리’였다. 뒤로 보이는 벽에 영화가 상영됐다. 정재용 기자

고된 노동에 비하면 식사는 보잘 것이 없었다. 꽁보리밥에 밥솥에 함께 얹은 호박잎과 된장, 그 호박잎에 밥 한 숟갈 얹고 된장과 고추장 찍어 붙여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풋고추와 마늘을 고추장에 찍어 먹었다. 풋김치로 비벼 먹기도 했다. 보리밥은 ‘근기(根氣) 없어서 방귀 한 방에 허기진다’ 할 정도로 소화가 잘 됐다.

논매기는 여름 내 계속됐다. 먼저 짧은 날인 못줄 댄 방향으로 기계를 밀고, 다음에 긴 날로 밀었다. 처음에 고래전, 양동들, 한들, 모래골 순서로 밀었다면 긴 날일 때도 그 순서대로 했다. 그래야 벼 뿌리를 안 다쳤다. 가로세로를 마치면 비로소 초벌매기가 끝난 것이었다.

열흘쯤 있다가는 다시 두벌매기로 들어갔다. 버드나무의 매미가 더워 죽겠다고 울어댔다. 자녀들은 여름방학이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논매고, 소 먹이고, 소풀 하고 온 여름을 그렇게 보냈다.

저녁상은 햇감자 잘라 넣은 손칼국수였다. 마당에 멍석을 깔고, 빨랫줄에 초롱불을 걸고, 모깃불 곁에서 먹었다. 불꽃이 오르면 생풀을 한 ‘자대기’(아름) 가져다 덮었다. ‘따불때이’(여뀌) 연기는 고추만큼 매웠다. “캑캑, 사람 잡겠네.” “논매다가 죽다 살았더니 연기에 죽겠네.”

포항으로 가는 기차가 기적을 울렸다. 강렬한 전조등 불빛이 들판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훑더니 본채 흙벽에 영화를 상영했다. 1분간 남짓 무성 흑백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