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67)흙 다시 만져보자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67)흙 다시 만져보자
  • 정재용 기자
  • 승인 2022.08.19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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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을 만지는 모내기, 흙을 밟는 논매기
광복 77주년을 맞으며

누군가 농부에게 “매일 그 힘든 일을 어떻게 하나?” 묻는다면 대답은 뻔했다. “하루 이틀 하는 일도 아니고 힘들다 생각하면 못 사는 게지”, “걱정한다고 다른 사람이 해 줄 것도 아니고”, “닥치는 대로 하는 거지 뭐” 등이었다.

모든 생업(生業)이 그렇듯이 ‘소털 같이 많은 날’에 ‘일 다 하고 죽으면 죽을 날 없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케세라세라’(스페인어로 ‘뭐가 되든지 되겠지’라는 뜻) 내팽개치는 것은 아니었다.

모내기와 달리 논매기는 그렇게 시간을 다툴 일은 아니었다. 그냥 오늘 다 못 매면 내일 매고 이런 식이었다. 농촌의 일정은 굵직굵직했다. 모내기면 열흘 연속 모내기, 논매기면 한 달 내내 논매기였다. 7월 중순부터 8월 중순은 날마다 논매기였다. 맨발로 진흙 위를 걸으며 제초기를 팔로 밀었다. 농부의 손발톱은 시커멓게 죽어나가고, 흙에 닳아 따로 깎을 게 없었다.

마을 앞길, 멀리 무릉산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마을 앞길, 멀리 무릉산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마을 뒤쪽의 ‘한들’ 논은 물대기가 힘들어서 늦모를 낼 때가 많았다. 논매기도 자연스럽게 늦어졌다. 농부는 이른 아침과 해거름에 논을 매고 한낮에는 낮잠을 잤다. 멀방(머릿방) 문지방을 베고 누운 농부 머리맡으로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다.

마을 주위 어디를 둘러봐도 시원한 바람 보내 줄 곳은 없었다. 드넓은 들판 위로 작열하는 태양, 그 빛을 가려 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산그늘, 나무그늘 멀고, 가끔 뭉게구름장이 마을을 덮지만 그건 잠시였다. 벼 포기 그늘에 숨어 있던 바람이 불어온 게 틀림없었다. 지친 농부, 단잠 자라고.

초복(初伏), 중복 지나면서 벼들은 부쩍 자라 들판은 초록빛 융단을 깐 듯 아름다웠다. 농부는 무더위에 무럭무럭 자라 준 벼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그러기에 그는 무더위를 두고 크게 탓하지 않았다.

모내기가 늦어 걱정하던 농부는 “잘 가는 말도 영천(永川) 장(場), 못 가는 말도 영천 장” 속담을 생각하며 결단코 따라 잡으리라 다짐했다. 벼농사는 마라톤과 같아서 끊임없는 농부의 정성을 요구했다. 물대기, 논매기, 비료하기, 농약치기, 피사리 등으로 다 된 농사 망치기 일쑤였다.

학교는 7월 마지막 주에 방학식을 하고 40여 일 간의 여름방학에 들어갔다. 개학은 9월 1일이었다. 광복절에는 전교생이 등교해서 운동장에 모여 기념식을 했다. 지루한 식은 광복절 노래를 부르고 끝났다.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이날이 사십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정인보(鄭寅普, 1893~1950) 작사 윤용하(尹龍河, 1922~1965) 작곡이었다.

‘흙 다시 만져보자’의 흙은 이상화(李相和, 1901~1943)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한탄하던 그 들판의 흙이었다. 그는 “내 손에 호미를 다오/ 살찐 젖가슴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팔목이 시리도록 매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해방을 애타게 그리다가 눈을 감았다.

소평마을의 앞 논 ‘안강들’은 일제강점기에 경지정리를 했다. 이는 앞거랑의 남쪽, 동서로는 큰거랑의 서쪽 구역으로, 안강평야 전체의 30% 가량 됐다. 소평마을에서 남쪽으로 보면 바깥공굴 너머로 철둑이 동서(東西)로 길게 놓인 철둑이 보인다. 1938년 7월에 개통한 동해선(東海線)이다. 안강 사람들이 지게로 모은 철둑이다. 그 철길을 통해 안강평야의 쌀은 외지로 실려 갔다. 소평사람들의 농토는 안강들은 적고 대부분 고래전, 양동들, 한들, 모래골, 야마리에 있었다.

학봉댁 황분조(黃粉祚) 씨는 집의 나이로 아흔, 1933년 계유(癸酉)생이다. 그는 두어 해 전인가 뜬금없이 “나, 일본식 이름은 히라다훈소(平田粉祚)였다”라고 말했다. 학교에 다니려면 창씨개명을 안 할 수 없고 더구나 어린이로서 어쩔 수 없었는데 스스로 부끄럽게 여긴 것으로 생각됐다. 일제강점기 안강에는 초등학교 두 개가 있었다. 일본인 자녀들이 다니는 안강국민학교와 조선인들이 다니는 안강제일국민학교였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해방을 맞았는데,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이가 황분조 씨다. 정재용 기자
아이를 안고 있는 이가 황분조 씨다. 정재용 기자

“소평에서 안강제일국민학교까지는 오리길(2km) 남짓으로, 지각을 안 하려면 매일 아침 달리다시피 했다. 지각을 하면 공부를 안 시켰다. 1교시 수업을 빼 먹고, 요새 풍산금속 가다가 있는 ‘산대’(山垈)까지 신작로 따라 달리기를 시켰다. 5학년 때 해방이 됐다. 한번은 학교에 갔더니 담임선생님이 ‘너희들은 해방이 됐다. 이제 나는 너희들과 헤어져 일본으로 돌아간다.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기 바란다. 그때 다시 만나자’ 순간 교실은 울음바다가 됐다.” 선생님 이름은 ‘가와고에((川越) 요시꼬’ 였다고 했다. 요시꼬(よしこ)는 숙자(淑子), 길자(吉子), 방자(芳子) 등인데 어느 것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정응해(鄭應海) 씨는 소화(昭化) 17년(1942) 3월에 천북공립국민학교(천북국민학교)를 졸업했다. 졸업대장에 그의 성씨는 상전(上田)으로 돼 있었다, 그가 87세를 일기로 고인이 된 지도 어언 9년이 지나 이름 네 자의 훈독(訓讀)을 알려 줄 이도 없다.

심훈(沈熏, 1901~1936)은 ‘그 날이 오면’ 시를 통해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鐘路)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鼓)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行列)에 앞장을 서오리다.”라고 노래했다.

어느덧 광복 77주년, 그 동안 ‘흙 다시 만져보자’ 감격하던 인걸(人傑)은 가고, 농사짓느라 손발이 닳도록 흙을 만지고 밟던 소평마을 사람 여럿도 세상을 떴다. 문득 광복의 벅찬 기쁨은 차치하고 광복절 노래를 외워 부를 수 있는 국민은 얼마나 될까 궁금하다.

찌는 듯한 무더위도 광복절로 고비를 넘었다. 초저녁 풀벌레 소리가 요란했다. 포항송도해수욕장은 곧 문을 닫을 것이라고 했다. 단잠을 자던 농부는 서늘한 공기에 잠이 깨어 방문을 닫았다. 달빛이 교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