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69)풍년가는 끝나고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69)풍년가는 끝나고
  • 정재용 기자
  • 승인 2022.10.21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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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지은 농사 태풍으로 망치기 일쑤
너른 들판에 낫 한 자루 들고 서서

추석을 맞아 객지로 나갔던 자녀들이 돌아오고 들판은 잘 익은 벼들로 황금바다를 이뤘다. 집집마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떠들썩한 얘기와 웃음소리로 잔치분위기였다. 농사일로 한적했던 골목도 사람들로 북적거려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텔레비전에서 풍년가(豐年歌)가 흘러나왔다.

“풍년이 왔네. 풍년이 왔네. 금수강산으로 풍년이 왔네. 지화자 좋다. 얼시(씨)구나. 좋구 좋다. 명년 춘삼월에 화전놀이를 가자.” [1976년 2월 1일 한국교육출판 발행, ‘최신 학교 음악’]

이 무렵 태풍소식이 들렸다. 태풍은 일순간에 농사를 망쳤다. 바람에 벼가 눕고 큰물에 벼가 잠겼다. 형산강 강물이 포항 앞바다로 빨리 안 빠지면 기계천이 범람하고 황톳물은 큰거랑을 타고 점령군처럼 마을로 들이닥쳤다.

큰물은 먼저 큰거랑 좌우의 양동들을 삼키고 이튿날은 안강들과 섬배기 일대를 호수로 만들었다. 세찬 바람에 빗방울이 창호지 문을 때렸다. 먹이를 찾으러 나서는 제비가 종잇조각처럼 나부꼈다.

물은 빨리 차오르고 더디 빠졌다. 물이 빠지고 난 논은 엉망이었다. 온갖 검불이 벼를 덮고, 벼들은 쓰러져서 논바닥에 누웠다. 오래 잠겼던 벼나 진흙투성이가 된 낟알에서는 싹이 났다. 그런 벼는 잘 돼야 싸라기였다.

9월 6일 양동마을 앞 형산강, 힌남노 태풍으로 큰물이다. 왼쪽에 기계천을 건너는 철교가 보인다. 강폭을 넓히기 전 안강평야는 자주 침수됐다. 정재용 기자
9월 6일 양동마을 앞 형산강, 힌남노 태풍으로 큰물이다. 왼쪽에 기계천을 건너는 철교가 보인다. 강폭을 넓히기 전 안강평야는 자주 침수됐다. 정재용 기자

누운 벼는 일일이 세워 네 포기씩 한 데 묶어야 했다. 농부는 이삭에 묻은 진흙을 일일이 물로 씻어냈다. 태풍이 지나 간 하늘은 능청스럽게 맑고 햇살은 따가웠다. 가뜩이나 속이 상해 죽겠는데 허리는 아프고 날은 더워 죽을 맛이었다. 이런 벼는 벼 베기 때도 힘이 배나 들었다

나락 베는 것을 “비 세운다”라고 했다. ‘베서 세운다’는 뜻이다. 볏단을 아름드리로 묶어서 논둑에 한 줄로 늘어세웠다. 이를 ‘바가리’라고 부르고 이렇게 하는 일을 ‘바가리 친다’라고 했다.

농부의 검고 앙상한 허리는 낫질을 위해 구푸릴 때마다 햇볕에 그대로 드러났다. 서 마지기 넓은 논에 그의 손에 들린 것은 기역 자 낫 한 자루가 전부였다. 벼가 잘려나가는 모습은 소가 풀을 뜯고 누에가 뽕잎을 갉아 먹는 듯 했다. 블레셋 군대의 미인계(美人計)에 속은 이스라엘의 사사(士師, judge) 삼손(Samson)의 머리칼이 들릴라(Delilah)의 가위에 잘려나가는 것 같았다.

농부는 풍년가를 떠올렸다. 풍년가는 풍년을 구가하는 축제의 노래이자 추수 잘 마치고 ‘명년(明年) 춘삼월(春三月)에 화전(花煎)놀이를 가자’ 농부를 구슬리는 ‘노동요(勞動謠)였다. 농부는 신라문화제 구경 안 간 것을 후회했다. 풍년가는 1920년경 경기도 광주지방 소리패들이 들길을 걸으면서 부른 ‘길노래’에서 유래한다.

농부는 벼 베기 전날 여러 개의 낫을 갈아 뒀다가 이튿날 아침, 밥상을 물리자마자 바소쿠리 얹은 지게를 짊어지고 논으로 나갔다. 바소쿠리 안에는 참으로 먹을 음식과 낫, 숫돌, 찌그러진 양은그릇 하나가 들어 있었다. 물주전자는 들었다.

닭과 강아지가 밖으로 못 나가도록 삽짝(사립짝)을 닫고 고리를 걸었다. 주인은 들로 나가고 짐승들이 집을 지켰다. 소와 송아지는 외양간에 앉아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벼가 가장 잘 된 데는 거름더미 있던 터였다. 일제(日帝)는 공출을 받을 때 이 거름더미의 한 평(坪)을 기준으로 전체 논의 곡수를 매겼다고 한다. 관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묵묵히 벼를 베고 ‘훌개’(벼훑이)로 훑던 농부를 생각한다. 이는 해방되고도 한동안 소작농에게 적용되다가 점차 도지(賭地)로 전환됐다.

추수를 기다리는 벼, 절토 안 한 방국댁 집터, 어래산. 정재용 기자
추수를 기다리는 벼, 절토 안 한 방국댁 집터, 어래산. 정재용 기자

낫 네 자루는 금방 날이 문드러졌다. 이는 휴식할 때가 됐다는 신호였다. 농부는 쉴 때마다 낫을 갈았다. 비스듬히 숫돌을 차리고 양은그릇에 담은 물을 곁에 뒀다. 이따금 물을 움켜 숫돌에 흘렸다. 낫 갈리는 물인지 숫돌 닳는 물인지 모를 탁도 높은 회색 물이 흘러내렸다. 엄지손가락 안쪽을 낫날에 대보고 갈린 정도를 가늠했다. 까끌까끌하면 다 갈린 것이었다.

농부의 아내는 미숫가루를 탔다. 술떡이 들어있는 삼베보자기를 펼쳤다. 막걸리를 들이키는 농부의 목이 울컥울컥했다. 빨래로 늦게 들로 나오는 날 아내는 참 때에 맞춰 밀가루 수제비를 이고 왔다.

점심은 집으로 들어가서 먹었다. 언제나 가축이 먼저였다. 닭 모이로 마당에 밀을 한 바가지 뿌리고 토끼장 마다 소풀을 한 움큼씩 넣었다. 소죽을 물통으로 담아 소죽통에 부었다. 점심을 먹고 잠시 누우면 솔솔바람이 눈을 감겼다. 그대로 푹 잤으면 소원이 없겠다 싶었다.

다시 마당을 나서며 농부가 말했다. “죽으나 사나 육군18병원에 니가 부지(너희 아버지) 찾으러 가자” 이는 어느 아낙이 6.25전쟁에 나간 남편은 소식이 없고 홀로 고된 농사일에 지쳐 자식에게 한 말로 보인다. 농사일이 힘들 때면 마을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이 말을 자주 했다.

‘육군18병원’은 6.25전쟁 때 경주시내에 있던 야전병원이다. 2019년 6월 27일자 경주신문에 실린 장혜정(88) 씨의 증언에 의하면 제18육군병원은 5개의 병동이 운영됐다. 장 씨가 간호보조로 근무했던 본동은 지금의 월성초, 제1병동은 경주공고, 제2병동은 계림초, 제3병동은 황남초, 제4병동은 경주중고였다.

낫을 놓고 바가리를 치기 위해 볏단을 논둑으로 나를 즈음 수요기도회를 알리는 예배당 종이 울렸다. 뎅그렁거리는 종소리를 두고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은 “천당 만당” 그런다고 했다. 밀레(Jean François Millet, 1814~1875)의 ‘만종’(晩鐘) 보다 어둔 하늘을 기러기 한 떼가 줄을 지어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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