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어날 추억 (65) 상주 공갈못
꽃 피어날 추억 (65) 상주 공갈못
  • 유병길 기자
  • 승인 2022.05.26 1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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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갈못 옛터 보존을 위해 1,000여 평 정도를 문화유산으로 보존하고 있다.
공갈못 옛터 표지석. 유병길 기자

1950년 ~80년 기계 이앙기가 보급되기 전 손모내기와 호미로 논매기할 때는 ‘상주 함창 공갈못의 연밥 따는 노래’를 노동요로 많이 부르며 힘들고 피곤함을 잠시나마 달래기도 하였다.

공갈못 노래 악보. 유병길 기자

상주 쌀이 유명하여 옛날부터 임금께 진상하게 된 밑바탕에는 공갈못이 있었던 것을 추정하여 본다. 가뭄 시에도 물 걱정 없이 적기 모내기를 할 수가 있어 품질 좋은 상주 쌀이 생산되었을 것이다.

상주 공갈 못의 전설은 지역적으로 다양하게 전하여 내려온다. 옛날에 공갈못을 완성할 수 없었는데,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면 된다.”는 말을 듣고 마을 사람들이 공갈이라는 아이를 묻은 후 못을 완성하였다. 그 못을 ‘공갈못’이라고 했다는 이 전설 외에 여러 가지 전설들이 전해지고 있다.

조선 초기에 작성된 ‘고려사(저자 김종서, 정인지 등)’에 지리지에 따르면 1,195년(명종 25년) 삼한시대 3대 저수지 가운데 공검이라는 큰 못은 축대를 쌓아 저수지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공갈못의 연꽃 모습. 상주시 제공
공갈못의 연꽃 모습. 상주시 제공

처음으로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환경부, 2011년 6월 29일)된 곳이다. 공검지는 1997년 경북 기념물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1950년대 중반 오태저수지 축조 계획을 세웠다. 그 당시 공검 외서 은척 지역에는 많은 무연탄 탄광이 있었으나 문을 닫는 곳이 늘어나고 폐금광도 많았다. 탄광에서 일하다가 놀고 있는 전직 광부들이 많이 있었다. 이곳은 저수지 예정지역은 둑을 막을 거리가 짧아 여건은 좋은 곳이지만 수자원이 부족한 곳이다. 전 현직 광부를 채용 오태리에서 우산천을 연결하는 터널을 뚫을 계획을 세웠다.

수자원이 풍부한 우산천에는 사시사철 많은 물이 흘러 낙동강으로 갔다. 그물을 터널을 통하여 들어오게 하여 저수지에 물을 가두기로 하였다. 6.25 사변 휴전이 되고 수리안전답으로 식량증산을 위하여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이때 인근 지역뿐만 아니라 봉강리의 어린 친구들도 터널을 뚫고 있는 오태리의 공사장에 구경을 많이 갔었다. 천정에는 물이 뚝뚝 떨어지지만, 레일 위에는 탄 차에 가득 실은 흙을 밀고 나오는 땀에 젖은 인부들의 모습이 기억을 스치고 지나간다. 오태저수지 둑을 막고 물이 차오르면서 오태리 앞의 일등호답이라는 논밭들이 수몰되었다. 그곳 주민들의 반대와 원망도 많았다. 처음 계획은 국회의원 출마한 추광엽 후보자가 공약을 냈으나, 백남억 국회의원이 당선되면서 정부 예산을 지원받아 오태저수지 공사를 추진하였다.

1959년 말 공갈못 서남쪽에 오태저수지가 완공되면서 물이 없는 공갈못은 ‘공검 장터 부지’와 논으로 변하고, 못은 조금만 남겼다. 1993년 공갈못 옛터 보존을 위해 1,000여 평 정도를 문화유산으로 보존하고 있다.

오태저수지의 모습. 태양광 패널이 일부 덮여있다. 상주시 제공

오태저수지는 경북 상주시를 대표하는 저수지로 공검면, 사벌국면, 외서면지역으로 또 터널을 뚫어 수로를 조성 이천리 봉강리, 상주시 남적동, 초산동, 화산동 일대 997ha의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2010년부터 2013년까지 둑 높이기 사업을 통해 제방길이 858m, 높이 16.8m, 총저수량 873만 톤으로 개발되어 상주시 최대규모의 저수지이다.

지난겨울과 올해 봄 가뭄이 계속되고 있지만, 오태저수지 수리지역은 물 걱정 없이 적기에 일품 쌀 모내기를 거의 다 마쳐 가는 실증이다.

※ 2009년 5월 공검지 복원공사를 통해 발굴된 옛 수문의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 결과 이곳의 축조 시기는 약 1,400년 전으로 추정 (상주시청 문화예술과, 2011) 및 '상주지'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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