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어날 추억] (64) 우리 고유의 농기구인 낫
[꽃 피어날 추억] (64) 우리 고유의 농기구인 낫
  • 유병길 기자
  • 승인 2022.05.17 1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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낫은 오랫동안 우리의 사랑을 독점하였으나, 바인더 콤바인 예취가 나오면서
추억속의 농기구가 되었다.
낫의 종류. <왼쪽부터 스테인리스 왜낫, 쇠 왜낫, 조선낫 3종류>. 쇠 낫은 할일이 없으니 녹슬었다. 유병길 기자

 

1950~ 70년 봉강리(경북 상주시 외서면)와 상주지역에서는 농작물을 베는 기구는 낫이었다. 벼 보리 밀 콩 참깨 들깨 삼(대마) 등을 베었고, 풀을 베어 소를 먹였고, 나무를 베어 땔감을 하였다. 산소의 풀을 베는 벌초도 낫이 다하였다.

우리 민족이 낫을 사용한 역사도 엄청 오래되었다. 농경생활이 시작되면서 도구로 발달 되었다. 청동기에 시대부터 쇠를 사용하였다. 대장간에서 쇠를 달구고 두드려 만든 낫은 날이 두껍고 무거운 조선낫이었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날이 얇고 가벼운 왜낫이 보급되어 벼 보리 밀 풀 등을 벨 때 사용하였다. 나무를 자를 때는 튼튼한 조선낫을 사용하였다. 낫자루는 나무였으나 90년대 이후에는 쇠, 알루미늄 자루에 플라스틱 손잡이를 붙여 사용하였고, 날도 알루미늄, 스테인리스로 바뀌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조할 때 낫 놓고 ‘ㄱ’ 자를 만들었다는 일화? 낫 놓고 ‘ㄱ’자를 모른다는 말이 있었다.

바인더의 종류. 유병길 기자

 

낫으로 벼를 벨 때 잘 베는 사람은 하루에 150평, 보통 사람들은 100평 정도 베었다. 이때 들판은 사람으로 꽉 차 있었다. 70년대 후반 도입된 바인더 한 대가 십여 명의 몫을 하여 대농가에서 많이 구입하여 사용하였다.

30kg 자루에 벼를 담았던 콤바인. 유병길 기자 

 

80년대 후반 도입된 콤바인이 벼를 베면서 동시에 탈곡 하다 보니, 낫으로 벼를 베던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굉음을 울리는 콤바인 몇 대만이 전국의 넓은 들판을 누비고 있는 실증이다. 콤바인이 공급되면서 벼 베기와 탈곡 작업이 동시에 이루어져 벼농사 기계화 작업에 큰 공헌을 하였다.

수확한 벼를 500kg, 1,000kg 포대에 옮겨담는 범용콤바인. 유병길 기자

 

콤바인은 물벼를 수확하므로 처음에는 벼 건조에 애로가 있었으나, 곡물건조기가 공급되었다. 90년대 초 미곡 종합 처리장이 시군단위로 전국에 설치되었다. 물벼를 수매하여 건조, 저장, 도정, 포장 작업을 일괄처리하여 편리한 쌀농사 시대를 열었다. 90년대 후반에는 범용 콤바인 공급으로 30kg의 포대에 일일이 담던 벼를 500kg, 1,000kg 포대에 담게 되어 노동력을 줄여 더 많은 면적의 벼를 수확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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