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산일폭루'의 정자 성주 만귀정
'만산일폭루'의 정자 성주 만귀정
  • 박미정 기자
  • 승인 2022.04.06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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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군 포천계곡에 자리한 만귀정,
벼랑 위에 '응와 이원조'가 산수를
즐기던 만산일폭루가 자리한다
성주 만귀정. 박미정 기자
성주 만귀정, 중후한 고택이 멋스럽다. 박미정 기자

성주 만귀정(晩歸亭•경북 성주군 가천면 신계리)은 조선시대의 건축물로 2004년 3월 경상북도의 문화재자료 제462호로 지정되었다. 

포천 제9곡인 홍개동, 그 오른편 벼랑위에 응와 이원조가 산수를 즐기던 '만산일폭루(萬産一瀑樓)'가 자리한다. '우주의 삼라만상이 결국은 하나의 이치로 귀결된다'는 '만수일리'(萬殊一理)의 철학을 담고 있다.

만산일폭루 현판이 보인다. 박미정 기자
빛바랜 고택이 멋스럽다. 박미정 기자

 

9곡은 '홍개동(洪開洞)', 큰물이 열리는 골짜기다. 서늘한 산바람 속에 늦은 목련이 꽃잎을 흩뿌려 놓은 길가에 만귀정 돌비가 서 있다. 모퉁이를 돌면 평삼문과 마주하며,  만귀산방(晩歸山房)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문 옆에 커다란 바위가 담장을  대신해  서 있는데 그 위에 절비 하나가 우뚝하다. '고판서응와이선생흥학창선비'다. 한주 이진상이 응와 이원조의 학문과 덕행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철판에다 새긴 것이다.

철재로 된 흥학창선비가 보인다. 박미정 기자
철재로 된 흥학창선비가 보인다. 박미정 기자

 

응와 이원조(凝窩 李源祚, 1792~1871)는 1792년 성주의 한개마을에서 태어났다. 입재 정종로의 제자로 18세 때 중광문과에 급제했다. 그는 대사관,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으나 벼슬을 하는 내내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고 전한다. 경주부사로 재직하던 중 부당한 뇌물을 요구하는 암행어사 김세호의 청을 거절하자 앙갚음의 장계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어 59세의 나이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만귀, '늦은 귀향이라는 뜻'으로 그는 정자를 짓고 이렇게 썼다. '나는 이제 늙었다. 벼슬길에 종적을 거두고 이 고요한 곳에서 몸을 쉬려 한다'

포천구곡 홍개동 계곡. 박미정 기자
포천구곡 홍개동 계곡. 박미정 기자

만귀정은 1m정도의 석축 위에 올라 있다.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로 마당에는 몇몇 바위가 삐죽삐죽 박혀 있다. 그는 이곳에서 책을 읽고 쓰며 향리의 선비들을 가르켰다. 구곡을 따라 이곳으로 온 제자들이 300~4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포천계곡은 성주 8경 중 4경으로 풍광이 매우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만선일폭루 옆 400여 년 된 소나무가 멋스럽다. 박미정 기자
만귀정 400여 년 소나무가 멋스럽다. 박미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