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 허봉조 기자
  • 승인 2021.05.25 10:0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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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 달 전에 이사 온 옆집, 천사 같은 손녀의 배꼽 인사와 바이바이
소통 부재의 할머니보다 천진난만한 아기가 이웃의 정 느끼게 해

초여름을 방불케 했던 5월의 한낮, 다소 피로하고 우울한 날이었다. 기분 전환을 위해, 멀리 버스를 타고 나가 물과 나무가 있는 곳을 걸으며 햇볕을 쬐기로 했다. 자외선 지수 ‘매우 높음’이라니, 선글라스와 모자 등을 챙겨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때마침 할아버지와 복도에 나와 있던 옆집의 두 살배기 손녀가 나를 보자마자 슬리퍼 신은 발로 쏜살같이 달려와 나의 품에 덥석 안기는 것이었다. 천사의 날개 같은 팔을 흔들며 다가오는 아기와 눈을 맞추기 위해, 나는 두 무릎을 완전히 꿇어야 했다. 예상치 못했던 아기의 행동에 일순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등을 토닥이며 따뜻한 정을 나누었다. 바로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몇 차례 더 등을 쓰다듬으면서 무릎을 털고 일어섰다. 아기의 할아버지 역시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직 말을 잘 못하는 아기는 몹시 기분이 좋은 듯 방긋 웃고 있었다. 그때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머니, 저 내일 우리 집으로 가요’라고 인사해”라는 것이었다. 이제 겨우 아기가 이웃과 정을 나누려던 참인데. “예? 집이 어딘데요”라고 물으니, ‘강원도’라고 했다. 섭섭해서 어떻게 하느냐며, 다시 한 번 인사를 하고 엘리베이터 앞으로 갔다.

옆집은 1월 중순의 살을 에는 듯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소리 없이 이사를 왔다. 너무 조용해서 사람이 사는 게 맞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사람이 드나드는 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거의 매일 택배 상자 한두 개 정도 현관 앞에 놓인 것을 보면서 온라인 구매를 선호하는 젊은 세대가 사는 것이리라 짐작했다. 그러나 엘리베이터에서 같은 층을 누르고 서 있는 낯선 여성은 나와 비슷한 연배였다. 먼저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온 반응이 시들했다. ‘세(貰) 들어왔는데, 굳이 소리 낼 필요가 있겠느냐’는….

한 달쯤 지났을까. 노란 메모지가 현관 손잡이와 투박한 잠금장치 위에 붙어 있었다. “아기가 자고 있어요. 벨을 누르지 말고, 똑똑 노크해주세요”라는 글귀가 적혀 있어, 아기가 매우 예민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현관문이 활짝 열리고, 할아버지와 손녀가 놀이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첫 대면이었다. 할아버지는 인사를 시켰고, 아기는 일어서서 배꼽 인사를 했다. 그리고 외출하는 나에게 단풍잎 같은 작은 손을 흔들었다.

아기와 나의 만남은 그렇게 복도에서나 엘리베이터에서 대여섯 번. 만날 때마다 아기는 나에게 배꼽 인사와 바이바이를 하고, 나는 아기에게 ‘아이구, 이뻐라’ 칭찬을 해주었던 것이 우리들의 대화방식이었다. ‘내 집이 아니니, 소통할 필요가 없다’며 마음의 문을 닫았던 소통 부재의 할머니보다 두 팔을 흔들며 달려온 천진난만한 아기가 이웃의 정을 듬뿍 느끼게 해주었다.

외가에 맡겨졌던 아기가 떠난 후로도 고개를 끄덕이는 이상의 대화는 없다. 그날의 아기는 헤어지는 섭섭함을 알고 달려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내에서 갇혀 지내다 우연히 만난 이웃의 정이 그리웠거나, 아이 좋아하는 옆집 할머니의 감성을 알고 무작정 달려왔던 것이었으리라. 아무튼 천사 같은 아기 덕분에, 이웃에 대한 존재감은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음이 사실이다.

‘가정의 달’이며, ‘계절의 여왕’이라는 정감 어린 5월. 가슴 깊은 곳에 자리한 우울했던 감정은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수시로 행복한 미소로 바뀌었다. 조그맣게 안겨 왔던 어린 아기의 따뜻한 품. 어쩌면 아기의 꾸밈없는 행동이, 친정엄마의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답답하고 무거운 나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준 것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1770~1850)는 ‘무지개’라는 시를 통해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며 동심의 소중함을 노래했다. 어린아이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다는 뜻이다. 천사 같은 아기를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활짝 웃으며 달려오던 아름다운 그 모습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오래도록 흐뭇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