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마을을 '양좌마을'로 고쳐 부르자
양동마을을 '양좌마을'로 고쳐 부르자
  • 김영익 기자
  • 승인 2021.01.19 17: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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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선비가 많이 배출된 마을이라 양좌동(良佐洞)이라고 불렀다

 

양동(良洞)마을은 원래 양좌동이었다. 한자로는 처음에 양월리(陽月里)의 좌측에 있다고 해서 陽佐洞이라 했다가 어진 선비가 많이 배출되자 良佐洞이라 고쳤다고 한다. 한자 이름을 바꿀 만큼 문인과 학자들을 많이 배출한 마을이다. 이 마을엔 대과에 급제한 인물만 해도 27명이 되고, 소과인 생진과에 급제한 인물은 89명이나 된다고 한다. 여기에 소과와 대과에 나아가지 않고 향리에 머물면서 학문과 교육에 힘쓴 인물들을 합하면 그 수는 매우 많다.

 조선 성리학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양동의 위치는 분명하다. 영남사림의 영수인 점필재 김종직(金宗直,1431~1492) 선생을 중심에 두고 보고라도 양동의 양민공 손소(孫昭, 1433~1592) 선생이 점필재 선생과 동방(同榜)이고, 양민공의 아들인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1463~1529) 선생과 유곡(柳谷) 손계돈(孫季暾,1470~?) 선생이 점필재 선생에게서 수학하였고, 우재의 조카인 회재 이언적 선생이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 추앙을 받았으니, 조선 성리학에 있어서 양동유학의 연원이 그 어느 곳보다도 앞서고 깊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회재 선생을 배향한 옥산서원이 도산서원과 덕천서원과 함께 영남의 3대 서원으로 불리워지는 것에서 사림에게 있어서 양동과 회재 선생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다.  더구나 "회재 선생의 도덕과 학문에 대해서 퇴계(退溪) 선생이 상세하게 말씀하셨으니, 어찌 후생이 덧붙여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라던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1513~1577) 선생의 말에서 회재 선생과 우재 선생이 태어나고, 자라고, 학문하던 양동마을과 양동유학의 진면목을 가늠할 수 있다.

양동, 곧 양좌동이 조선의 선비들과 유학자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에 대해서는 창헌 조우각(趙友慤, 1765~1839) 선생이 쓴 '양동구곡가'에서 알 수 있다. '양동구곡'의 서시(序詩)를 보자.

천지동두강악령(天地東頭降嶽靈) 하늘땅 동쪽머리에 산악의 신령스러움이 내려와, 집성금옥시종청(集成金玉始終淸) 금과 옥이 모두 모여서 언제나 푸르도다. 공지궐리안자향 (孔之闕里顔子巷) 공자 살던 마을이요, 안자가 살던 거리여서, 현조현손세유성(顯祖賢孫世有聲) 훌륭한 조상 뛰어난 후손 대대로 명성이 높네.

창헌 선생은 양동구곡의 서시에서 백두대간의 정기가 동쪽 땅의 끝에서 응결된 곳에 양동이 있고, 이런 곳에 공자와 안자(顔子)와 같은 성현이 사셨고, 훌륭한 조상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후손들이 대를 이어가며 조상의 유훈을 지켜가며 살아가고 있다고 노래하고 있다.

말 물자 형으로 뻗어내린 설창산의 기슭에 경주 손씨와 여강 이씨가 서로 이웃하여 살면서 학문을 장려하고 함께 후손을 가르치는 아름다운 풍속이 이어지고 있는 마을의 모습을 그려놓았다.

양동은 우재 선생과 회재 선생 이후 600년여 년의 시간동안 후손들이 이어오며 마을을 유지해왔다. 서백당을 비롯하여, 관가정, 무첨당, 낙선당, 향당, 양졸당, 수졸당, 설천정, 등 종택(宗宅)을 중심으로 여러 고택(古宅)들이 남아있고, 안락정, 강학당, 경산서당 등이 남아 전한다. 양동이 유네스코 세계유산마을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은 600여 년의 시간동안 함께 바른 가치와 의미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 왔기 때문이다.

양동마을, 어느 순간 우리는 마을을 이렇게 부르고 있다. 하지만 양동마을의 원래 이름은 양좌동(양좌마을)이다. 선비가 많이 배출된 마을이라 해서 이름지어진 양좌마을, 양좌마을의 이름을 다시 찾았으면 한다. 양좌마을은 이 마을의 정체성이고, 나침판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사태로 모든 것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경주 외곽에 있는 마을을 찾아서 여강 이씨 대종회 이중원 회장을 찾아서 이 곳의 마을 유래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