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근대골목] 달성공원의 기념비들(2)
[대구근대골목] 달성공원의 기념비들(2)
  • 안영선 기자
  • 승인 2020.11.30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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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선생, 석주 이상룡, 석재 서병오, 죽농 서동균

대구 달성공원의 기념비 중 이상화시비, 어린이헌장비, 달성서씨 유허비와 최재우 동상 외에도 구한말 의병대장 왕산 허위선생 순국 기념비와 석주 이상룡 구국기념비, 팔능거사 석재 서병오 선생 예술비, 사군자의 대가 죽농 서동균 예술비도 있다.

의병대장 왕산 허위선생 순국기념비는 달성공원의 남쪽에 있는데, 1962년 10월 3일 왕산허위선생기념사업회에서 새운 비이다. 선생은 구한말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정미의병 당시 '서울진공작전'을 주도한 분이다. 일제의 사전 봉쇄로 작전은 실패했지만 선생이 진격했던 동대문에서 청량리 구간은 1966년 이후 그의 호를 따 왕산로로 불리고 있다. 1908년 일제에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선생의 옥사 이후 구미 임은동의 허씨 일족은 일제의 핍박을 피해 만주로 이주했고 현재 국내를 비롯 러시아, 중앙아시아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선생의 질녀는 시인 이육사의 부인이다. 

왕산 허위선생 순국 기념비  안영선 기자

왕산 허위선생비 옆에는 석주 이상룡(1858-1932) 선생의 구국 기념비가 있다. 선생은 안동 태생으로 청년 교육과 독립군 양성에 헌신한 독립운동가이다. 1925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하였으나 사상적 대립과 파쟁으로 사임하고 서간도에서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의 통합운동을 지도하다 1932년 5월 길림성에서 사망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구국기념사업회에서 1963년 5월 기념비를 세웠다. 경상북도와 대구시가 후원했으며 석주 선생의 제자 이은상이 글을 짓고 성산 이기윤이 비문의 앞글을 쓰고 제자 종주가 비문의 뒷부분을 썼다.

석주 이상룡 구국 기념비    안영선 기자

달성공원 정면에서 잔디밭을 지나 오른쪽 서침나무 옆에 석재 서병오 선생 예술비가 있다. 석재 서병오(1862-1935) 선생은 조선 후기에서 일제 강점기까지 많은 제자를 배출한 달성서씨 가문의 대표적 인물이다. 달성서씨 대종회에서 1983년 예술비를 세웠다. 선생은 시, 글씨, 그림, 가야금, 장기, 바둑, 의약 등에 능하여 팔능거사라고 불렸다. 글씨는 행서, 그림은 사군자에 특히 뛰어났는데 친일파 박중양이 그림 한 폭을 청하자 '당신같이 이름 높은 분은 일본 화가들에게 얼마든지 받을 수 있을 텐데 하필이면 나한테 받으려 하느냐' 며 거절했다고 한다.

석재 서병오 예술비    안영선 기자
석재 서병오 예술비    안영선 기자  

 

서병오 선생 예술비의 오른쪽으로 20여 미터 쯤에 죽농 서동균 예술비가 있다. 1902년에 태어나 19세 때 석재 선생에게 서화를 배우고 스승의 예술세계를 계승하면서도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한 영남의 대표적인 서화가이다. 죽농이라는 아호도 스승께서 지어 주셨고, 스승이 작고할 때 당시 35세의 서동균에게 자신의 명정을 쓰게 했다고 한다. 1919년 삼일운동 때 대구만세운동에 가담했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고 광복 후에는 경북여고, 신명여고 등에 재직했으며 1975년 서예부문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훈장인 대한민국예술문화상을 수상했다. 1978년 타계할 때까지석재의 유업인 교남시서화연구회를 계승해 후진을 양성했다. 비문의 앞글은 죽농 선생의 제자인 동애 소효영 선생이 썼다.

사군자의 대가 죽농 서동균 선생 예술비   얀영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