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화두는 나" 중견 불화작가 묵연 김옥연 씨
"나의 화두는 나" 중견 불화작가 묵연 김옥연 씨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0.08.10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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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상에서 깨어나 뒤바뀌어 살고 있는 현실부터가 시작이다.
그때 배운 주량이 여전하여 소주 세잔이라며 웃는다.
불교에 관한 단어가 무의식중에 불쑥불쑥 튀어 나온다.
과거의 표현방식이 지금으로 변하듯 향후 작가의 작품세계가 궁금하다.
작품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김옥련 작가. 이원선 기자
작품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김옥연 작가. 이원선 기자

“나의 작업은 전통과 현대의 삶 가운데서 그냥 흘러가는 시간 속에 나 그리고 내 속의 “나”라는 화두를 가지고 끊임없이 되뇌고 성찰한다. 흔들림 없는 믿음을 얻고 크게 변화하고자 할 때 나를 성숙시키고 내 안에 내재하여 있는 영감을 바탕으로 한지라는 오브제를 통하여 작품에 몰입하게 된다. 몽상에서 깨어나 뒤바뀌어 살고 있는 현실부터가 시작이다. 그것이 나의 작업에 있어 또 하나의 화두가 되어 나를 깨운다. 오직 그 속에서 나를 찾는다. 오늘도.” -'작가노트’에서

*화두(話頭): 불교 선원에서, 참선 수행을 위한 실마리를 이르는 말

합천 해인사 성보박물관 전시실에서 중견 불화작가 묵연(默蓮) 김옥연(金玉蓮·61) 씨를 만났다. 고향은 경북 안동시 도산면 의인리로 현재는 안동댐으로 인해 수몰이 지역이 된 지역이다.

먼저 늦깎이로 불화작가가 된 계기에 대해서 물었다.

“나는 내가 어디에 있든 최소한 가족에게 만큼은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다”며 어렵게 입을 연다. 어떻게 보면 우연한 기회였다고 했다. 안동댐으로 인해 고향이 수몰에 처하자 대구로 시집을 왔다. 작가의 말로는 일찍이 청상이 된 시어머니를 모시는 시집살이는 조선시대를 겪는 듯 했다고 했다. 날로 심신은 지쳐갔다. 힘이 있을 경우 100근의 짐도 넉넉하지만 지친 심신은 눈썹 위에 내려앉은 먼지조차 무거운 법이다. 작가가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 따뜻하게 손을 내민 사람은 남편이라고 했다. 후일 시어머니는 임종 직전 그간의 시기와 질투, 애증, 노고와 고마움을 오롯이 녹여내듯 며느리의 두 손을 꼭 잡았고 그런 시어머니가 와병 중 토한 음식을 두 손으로 받은 작가는 비위가 약한 중에도 역하고 더럽기보다는 오히려 구수한 느낌을 받았다고 지난날을 토로한다. 7남매 중 막내로 귀엽게 자란 작가는 지금도 그날 그때가 신기한 일로 기억될 만큼 뜻밖이었다며 두 손을 살포시 모아서 내려다본다.

남편이 내민 손을 잡은 작가는 다음날부터 남편과 같이 출근길에 올랐다. 신발 매장을 운영하던 남편은 낮 시간 만큼은 시어머니와 떨어져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짬을 만들어 준 것이다. 첫 개인전 역시 남편의 물심양면,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며 예나 지금이나 남편에 대한 고마움은 잊지 못한다는 작가는 덧붙여 남편의 그러한 믿음, 배려, 사랑이 없었다며 이 자리에 없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오늘도 무사히”라는 기도 아닌 기도를 하며 남편과의 출·퇴근 길은 부부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늘 같이 퇴근을 하다가보니 가끔 포장마차 또는 대폿집이나 인근 식당에 들러 소주 한 잔 기울이는 날이 종종 있었다. 이를 두고 뭇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남편과 나이 차이가 있다 보니 어느 날은 식당주인 다가와 애인 사이, 친구 사이, 부부 사이냐고 사람들이 제각각의 추측으로 내기까지 걸었다고 했다. 그때 배운 주량이 여전하여 소주 세 잔이라며 웃는다.

작품 연입 속의 향연. 이원선 기자
작품 '연잎 속의 향연'. 이원선 기자

매장에 출근한 작가가 카운터에 들러 간단한 잡무를 처리한 뒤 제일 먼저 찾은 곳은 대구시 중구에 있는 중앙도서관이었고 맨 처음 배우기 시작한 것은 ‘명심보감’이라고 했다. 명심보감이 끝나자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작가는 한국화, 문인화, 수묵화, 서예 등등 닥치는 대로 배웠다고 했다. 배움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각오를 다진 때이기도 했다. 칠판을 지우고 청소는 물론 허드렛일을 도맡아 향학열을 불태웠다. 당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선생님(심산 윤종식)이 소나무를 그리는 방법으로 붓대를 툭툭치는 데서 눈앞에 나타나는 형상이 너무 신기해서 신기루 같았다고 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남들이 한 장을 연습하면 작가는 3, 4장에 자신을 집어넣어 불태웠다. 그즈음 이미 배움에 대한 물꼬가 트인 작가는 늘 갈증과 허기를 느끼고 있었다.

불화작가 하면 부처님 또는 관세음보살, 그도 아니면 탱화나 벽화가 보통인데 그는 수미단(須彌壇: 사찰의 법당 등에 설치하는 수미산 형상의 단)을 주로 한다. 수미단은 수미산(須彌山: 불교의 우주관에서 나온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하는 상상의 산)이 법당으로 들어오는 순간 불단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배움에 목말라하던 작가는 과거 유명작가로 외국 등지를 오가며 활동했지만 현재는 깊은 산속에서 수도에 정진 중인 스님을 소개받는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배움에 목말라하던 작가는 그 스님과 사제 관계의 연을 맺어 배움에 몰입했다. 그러나 그 배움은 만만치가 않았다고 했다. 불교의 교리는 스스로 자신을 깨우쳐 부처님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다. 배움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림, 나아가 불화라 해도 손을 통한 붓끝의 가르침이 아닌 마음 속의 길을 찾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불제자는 아니지만 화두를 심는 것이다. 스스로를 깨우쳐 길을 찾는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고행의 연속이다. 스님이 한 장의 그림을 원하면 10장의 그림을 스스로 연습했다는 작가는 그 어렵고 난해한 길을 묵묵히 참고 인내하며 정진했다.

작품 '꿈으로부터 회귀'옆에 나란히 선 김옥련 작가. 이원선 기자
작품 '꿈으로부터 회귀' 옆에 나란히 선 김옥연 작가. 이원선 기자

처음 1년은 선(一 한일 자)을 긋고 점을 찍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스승은 백지 한 장을 내어주며 마음을 비우듯 채워 오라고 했다. 며칠을 고민 끝에 절간의 문에 깃든 문양으로 백지를 채웠고 그림을 본 스승은 “이게 네가 갈 길”이라며 한지를 준비하라고 일렀다. 그리고 그 길은 우화등선이란 과정 등을 거치며 작가의 고뇌와 인내 속에 세월의 덮개를 차곡차곡 더해서 지금에 이르렀다고 했다.

우연한 기회에 경산시에 있는 환성사를 들렀다. 그때 대웅전에서 결과부좌를 한 부처님을 향하던 눈길이 아래로 내려오던 순간 작가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고 갯벌에서 진주를 발견하듯 작가는 “내가 갈 길은 바로 이거다”하고 느꼈다고 했다. 그때 작가가 본 것은 유형문화재 439호 경산 환성사 대웅전 수미단(慶山 環城寺 大雄殿 須彌壇 2012-05-14지정)이다.

작가는 평소 불화라는 특정한 장르로 인해 대중들에게 친밀하게 다가가지 못함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나무를 조각한 수미단을 다른 재료로 달리 표현하면 좀 더 대중들에게 녹아들어 어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불화작가로 불교와의 관계를 묻자 "마음의 안식처"란 대답이 돌아왔다. 시어머니의 오랜 병수발 중 “내가 내 가족 한사람조차 책임지지 못한다면 무슨 염치로 유교나 불교를 들먹거리고 또 온전한 사람이라 하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자 모든 것이 달리 보였다고 했다. 과거의 업보에 기억이 머물고 또 그 기억에 집착해서는 현재와 화해할 수 없다는 어느 스님의 법문을 마음에 새긴다는 작가는 어릴 적부터 유교사상에 젖어 살아선지 불교라는 종교에 생각처럼 쉬이 녹아들지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늘 절에 다니고 불화작가로서 많은 스님들을 대하다 보니 자연히 불교를 도외시할 수는 없다고 했다. 천수경(千手經: 불교의 경전 중 하나로 관세음보살이 부처에게 청하여 허락을 받고 설법한 경전)을 외우고 어쩌다 3천 배를 올리고 108배는 수시로 한다고 했다. 그리고 보니 인터뷰 중에도 불교에 관한 단어가 무의식중에 불쑥불쑥 튀어 나왔다.

해인사와 특별한 관계가 있냐는 질문에는 불교에서 중시하는 인연, 모든 것이 인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했다. 7년 전 어느 날 대구 동화사 통일대전에서 50여 일간 전시회를 가졌고 그때 도록을 받으신 분의 추천으로 이번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며 인연이란 것이 참으로 오묘하다며 웃는다. “어떻게 그분은 내 도록을 지금껏 지니고 있었을까? 인연이라는 것이 참으로 불가사의하죠.”

시어머니와의 화해 이후 모든 일이 잘 풀렸다는 작가는 또 그 인연 덕택에 포트폴리오도 없이 거의 보름도 채 안 걸려 일사천리로 전시회를 열었다고 했다. 전시회 개최 첫날은 해인사를 비롯한 각지에서 몰려드는 스님과 일반인들로 인해 대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작가는 합천 해인사 성보박물관에서 오는 8월 30일(일)까지 개인전시회를 개최 중이다. 관람료는 없으며 해인사를 방문하는 사부대중을 비롯한 누구나 관람할 수 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좀 더 작품 활동에 정진할 계획이며 현재로서는 제자를 받을 생각은 없다고 했다. 작가를 알고 있는 지인(모 대학교 총장) 한 분이 강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겠다는 제의를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어느 날엔 배움에 목말랐던 작가에게 과거의 스승이 그랬던 것처럼 백지 한 장이 필요한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며 여운을 남긴다.

방명록을 살펴보고 있는 김옥련 작가"高高峯頂立 때로는 높이높이 산 위로 솟아오르고深深海底行 때로는 깊이깊이 바다 밑에 잠기라."라는 옛 선사의 게송이 언뜻 보인다. 이원선 기자
방명록을 살펴보고 있는 김옥연 작가. "高高峯頂立(고고봉정립·때로는 높이높이 산 위로 솟아오르고) 深深海底行(심심해저행· 때로는 깊이깊이 바다 밑에 잠기라)"라는 옛 선사의 게송이 언뜻 보인다. 이원선 기자

현재 작가가 주로 하는 작업은 수미단을 예술적으로 재구성하여 작품화하는 것이다. 한국화를 밑그림으로 위에 한지원료를 이용하여 부조를 만든 뒤 아크릴을 입히는 것이다. 처음에는 마애불, 단청 등을 나타냈지만 현재는 오롯이 수미단만을 표현하고 있고 현재 진행 중인 개인전이 “수미산 가는 길”이란 주제답게 한 중앙으로 길을 내어 표현하고 있다. 과거의 표현방식이 지금으로 변하듯 향후 작가의 작품세계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