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가슴에 묻었던 똥개, 또 곁을 지키는 말티즈
어린 가슴에 묻었던 똥개, 또 곁을 지키는 말티즈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0.09.2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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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수고로움 끝에 얻은 별명 치고는 서러운 똥개다.
끝내 녀석은 뒷산 기슭 양지바른 곳에 묻혔다.
어는 때는 꿈속을 헤매는지 웅얼거리기까지 한다.
가끔 주인을 물지만 여전히 귀여운 말티즈! 이원선 기자
가끔 주인을 물지만 여전히 귀여운 말티즈! 이원선 기자

처음 개를 키우자는 가족들의 요구에 대책 없는 반대의 깃발을 들었다. 개가 싫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머릿속에 잠재했다가 두더지잡기처럼 불쑥불쑥 고개를 내미는 한 토막, 과거의 기억 때문이었다. 아린 기억과는 달리 어설프게 반대를 했나 보다. 그도 아니면 아내도 자식도 이길 수 없는 수수깡 같은 허울만 좋은 가장이란 명분도 한몫 했었나보다. 어느 날 말티즈 한 마리가 예상보다 빨리 가족을 자처하며 집으로 들어왔다.

눈도 제대로 뜨질 못하는 말티즈를 놓고 언쟁이 벌어지는 모습조차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알고 보니 순종 말티즈는 30만원 선인데, 믹스견인 녀석의 몸값은 10만원이란다. 헐값인 녀석으로 낙점된 것이 문제의 단초였다. 싼 게 비지떡이고, 놓친 물고기가 커 보이듯, 가족들은 막상 집에 돌아와서 보니 비싼 몸값의 말티즈가 눈에 밟힌 모양이다. “다 엄마 때문이야!”하는 아들의 원망을 “그러게 용돈 좀 모아 놓든가?”하고는 “얘도 입 천장이 까맣잖아!”로 일단락이다.

1960년대 말 경으로 기억된다. 누렁이란 이름처럼 누런 빛깔에 허우대가 헌칠한 녀석은 말 그대로 똥개였다. 똥을 먹는 개란 뜻이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그들의 사명이자 의무이기도 했다. 전력을 다하는 모습은 오히려 숭고하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아무런 똥이나 마구잡이로 먹는 것은 아니었다. 주인이 내린 명령에 한없이 복종하는, 그래서 주인이 지적하는 똥만 먹었다.

당시의 방에는 짚으로 엮은 거적이 깔려 있었다. 아기들은 온 방안을 기다가 아무 데나 응가를 했다. 가족들이 치운다고 걸레로 문지르고 닦아도 거적이 가지는 특수성에 의해 성근 틈 사이로 파고든 찌꺼기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다. 생각 끝에 불러들인 것이 똥개다. “워~리!”하고 부르면 냉큼 뛰어들어 “됐다”는 만족한 말이 떨어질 때까지 최선을 다했다. 길게는 한 시간 동안이나 이어지는 지난한 노력으로 응가의 흔적은 물론 냄새까지 말끔히 지웠다. 그런 수고로움 끝에 얻은 별명 치고는 서러운 똥개였다.

그런 똥개가 갑자기 사라졌다.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녀석이 사라진 집안은 온통 다 빈 듯 썰렁했다. 불현듯 똥개가 죽었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당시의 개들은 거의가 식용이었다. 아무리 귀엽고 영리하다고 해도 가축으로 태어난 이상 피해갈 수는 없었다. 그것은 한 나라의 임금이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성종 임금이 즐겨 타던 애마가 죽자 왕은 무덤을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신하들은 “말의 무덤은 솥입니다”하며 결사 반대를 했다. 결국 그 말은 가마솥을 무덤으로 삼아 삶아졌다. 이는 가축에게 주어진 굴레이자 운명인 것이다. 그도 아니면 이웃한 집이나 시장을 통해 팔리는 것이다.

눈앞이 흐려졌다. “엄마 우리 집 똥개는?”

“응! 보올~쌀 두 됫박에 팔았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앞섰다. 어머니께서도 생각해 보건데 그간의 정 때문에 차마 집에서 잡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때마침 이웃 동네에서 개를 산다기에 팔았던 모양이었다. 눈 앞에서 죽어 가면 그 서러움을 어찌 감당할까? 한 짐을 던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그리움까지 몽땅 가져가지는 못했다. 녀석을 옭아매던 텅 빈 말뚝과 찌그러져 엎어진 양푼이가 조석으로 눈에 밟혔다.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날은 안날 초저녁부터 밤을 꼬박 새운 빗줄기가 오전 내내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움에 지쳐 얼굴이라도 한 번 보자는 심정으로 녀석을 찾아나서는 길에 흩뿌리는 빗방울은 옷을 적셨고 구멍 뚫린 검정고무신을 통해 허방에 고인 물이 질척거렸다. 하지만 미구의 맞이할 꿈같은 희망이 모든 걸 감내케 했다. 마침내 이웃한 동네 앞에 다다랐지만, 바람을 탄 파도처럼 황톳물이 일렁이는 낙동강 앞에서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먹장구름이 오락가락하는 하늘을 우러러 그리움이란 단어를 무심한 가랑비 아래서 소리 없이 씻었다. 어쩌면 그것은 처음부터 마음뿐이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질긴 것이 정이라고 혹시나 하는 발걸음은 미련이 남아 100여m를 두어 번을 더 오르내렸다. 마침내 체념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발걸음을 돌리는 찰나 노란 점 하나가 보일 듯 말듯 황톳물 속에서 들락날락 자맥질하는 것이 아닌가.

집 안을 이잡듯 뒤지다가 잠시 쉬고 있다. 이원선 기자
코를 '킁킁'거리며 집 안을 이 잡듯 뒤지다가 잠시 쉬고 있다. 이원선 기자

누가 뭐라고 해도 개는 역시 개였다. 식어가는 주인의 냄새를 동물적인 감각으로 맡았는지, 시력이 남달라 자신을 배반한 주인을 한 눈에 알아 봤는지, 그도 아니면 떼어 버린 정일 망정 뒷모습이 눈에 익었는지, 죽음을 도외시한 듯 넘실거리는 황톳물에 몸을 의탁하여 커다랗게 포물선을 그리고 있었다. 출발 지점에서부터 강물을 따라서 천천히 흘러내리는 모습이 말이 아닌 우직한 소를 닮았다. 그렇다고 산다는 보장은 별로 없었다. 물은 흔적을 지우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간간히 떠내려 오는 덤불이나 통나무 등등이 불식간 덮치면 순응 따위는 그저 작은 몸부림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강 건너에서 보이는 주인을 재차 따르고자 목숨을 건 도박을 하는 누렁이였다.

힘을 내라고 응원인 듯 고함을 치는 내내 롤러코스터를 타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머리가 잠겼다 뜨기를 수십 차례, 녀석이 기어이 강 가장자리 한 뼘 드러난 모래톱에 닿았다. 반가움에 양팔을 벌리자 지치고 무거운 몸을 추스르기도 전엔 냉큼 어린 주인의 품에 달려들었다. 한숨을 돌린 녀석이 부르르 몸을 떨자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겼다. 그새 비가 그치고 구름 사이로 태양이 떴나 보다. 바람에 풀잎이 눕듯 고개를 숙인 머리 위로 작은 무지개가 떴다. 목을 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가자 손 안에 든 붕어처럼 팔딱인다. 시큼한 흙냄새와 물비린내가 이슬내린 새벽녘의 산책길처럼 신선했다.

황톳물이 숙진 며칠 뒤 어머니께서는 보리쌀 두 되를 되돌려주었다며 “이제 이 일을 어찌할꼬!” 한숨을 쉬셨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원만하게 해결되어 행복만 있을 줄 알았다.

그날도 학교를 파하고 곧장 집으로 돌아왔지만 당연히 있어야 할 똥개가 보이질 않았다. 삼복 중이라면 모르겠거니와 여름도 아닌 계절에 개를 잡을 리가 없는데...! 이번에도 어머니를 찾자 마자 “똥개 또 팔았어?”하며 다그쳤다. 어머니는 안됐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죽었다”며 말끝을 흐리셨다.

겨울철로 접어들면 쥐약 놓는 날이 많았다. 그리고 그런 날이면 내 집 네 집 할 것 없이 모든 집안이 가축의 잡도리를 단단히 했기에 어느 집도 피해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런 통보 없이 간혹 개인적으로 쥐약을 놓는 집이 있었다. 그나마 새벽 일찍 치우면 괜찮지만 늦어지면 결국 사단이 생기는 것이다. 녀석이 그 사단의 주인공이 된 것이었다. 사잣밥인 줄은 꿈에도 알 리가 없는 똥개가 몇 번 킁킁거리다가 날름 먹은 모양이었다. 녀석은 뒷산 기슭 양지바른 곳에 묻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몇 해 전, 키우던 말티즈를 데리고 고향집을 찾자 “개 키우니?”하시며 머리를 쓰다듬으며 “참 귀엽네!”하셨다. 옛 기억을 지운 모양이다 싶어서 “한 마리 살까요?” 여쭙자 무슨 생뚱맞은 소리냐는 듯 “키우는 것은 싫다”며 일없다는 듯 손사래치셨다.

함께 생활한지도 벌써 십수 년째, TV를 통해보는 영특함은 없지만 ‘띵~ 띵’하고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 소리와 발자국 소리를 용케도 알아듣고는 어떤 때는 짖고 또 어떤 때는 꼬리를 흔들어 애교를 떠는 등 요물이 되어가고 있다. 처음 왔을 때와는 달리 이제 자식들은 제 나름대로의 삶을 찾아 집을 떠났다. 처음 같은 열정으로 데리고 간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머잖아 모두 떠나고 나면 그리움과 기다림을 함께할 녀석이다. 무얼 알아들을까 싶지만 가끔은 팔불출이 되어 이름을 부르고 말을 건넨다.

그러고 보니 그간 깨알 같은 소소한 정이 많이도 들었나 보다. 아침 저녁으로 이 방 저 방을 찾아 문안인 듯 잠시 머물러 갈 때는, 아닌 게 아니라 자식보다 났다는 생각도 가끔씩 든다. 저나 나나 이제는 둘 다 시니어다. 나보다 더 늙어 지공거사에 접어들었는지도 모른다. 작년 겨울에는 노인병으로 무릎수술까지 받았다. 확률적으로 녀석이 먼저 죽을 것이다. 그 책임은 어머님의 한탄처럼 손사래를 치는 등 악착같이 반대를 못한 내 짐이기도 하다.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지금도 태평천하, 의자 뒤에 깔개를 깔고는 곰처럼 웅크려 발바닥을 핥다가는 코까지 골면서 잠에 빠진다. 어떨 때는 꿈 속을 헤매는지 웅얼거리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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