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치매 연기
아버지의 치매 연기
  • 허봉조 기자
  • 승인 2020.08.07 1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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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장기요양보험 혜택 받기 위한 노력과 편법보다
생활에 어려움 겪는 노인에게 도움의 손길 열리기를

“아버지, 시험 잘 보셔야 됩니다.”

“뭐? 시험을 보라고….”

예순 중반의 딸과 아흔 중반 아버지의 대화 한 토막이다. 다른 지방에서 살고 있는 딸이 모처럼 친정을 찾았다. 노인장기요양보험 혜택을 받기 위해 아버지가 치매 등급 판정을 받아야 된다고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부모님이 모두 아흔을 넘기셨으니 어지간히 기억력이 쇠퇴하기도 했거니와 아버지는 청력에 문제가 있어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에 약간의 애로가 있는 상태다. 귀는 어두우나 꾸준한 운동으로 등허리가 꼿꼿하신 아버지에 비해 밥을 끓여먹어야 하는 엄마는 허리와 팔다리, 어깨 등 어느 한 군데 아프지 않은 곳이 없을 지경이다. 하지만 멀리 떨어져 사는 자식들이 자주 도와드리기는 한계가 있으니, 노인들을 위한 복지혜택이라도 받아보려는 참이었다.

엄마가 자주 만나는 이웃들이 한두 마디 자극적인 말을 건네 온 것은, 몇 년 전부터였다. ‘다른 집에는 상황이 훨씬 나은데도, 방문요양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적극적으로 방도를 알아보고 조치를 취해주지 않는 자식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원망이 서려있었다. 엄마로부터 그런 말씀을 전해들을 때마다 자식들은 난감하고, 의아했다.

치매 환자가 아닌데, 어떻게 치매 등급을 받았을까. 바람결에 들려오는 말에는, ‘연기를 잘 해야 된다’고 했다. ‘반복해서 신청을 해야 된다’고도 했다. 거짓말을 못하는 엄마가 두 번이나 심사 과정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셨으니, 다시 신청을 해도 뾰족한 수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청각 장애에 고혈압과 알츠하이머 예방약 복용 등 참작할 여지가 충분한 아버지에게 그 역할을 맡기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딸은 혹시라도 이 일로 아버지의 자존심에 상처가 생기지는 말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번에 또 탈락하면, 가사도우미를 불러야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잣대처럼 정확하고 칼날처럼 날카로우신 아버지가 적당히 알고도 모른 척 연기를 잘 해주시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치매 등급 심사를 받는 날이었다. 아버지의 상태를 파악한 젊은 심사관이 종이에 글씨를 써서 질문을 하거나 보호자로 나선 딸에게 내용이 맞는지를 확인하기도 했다. 이름과 주소 등 인적사항과 알츠하이머의 기본증상과 주변증상들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이 이어졌다. 아버지는 딸과의 대화를 상기하며 잠깐씩 웃거나 먼 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기도 했으나, 대답은 매우 순조로운 편이었다.

마지막으로 심사관이 방의 위치를 확인하려고 했을 때, 아버지는 방과 방 사이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며 우왕좌왕 헤매는 모습을 보이셨다. 심사관은 딸에게 눈짓을 보냈고, 딸 역시 아버지의 행동에 버금가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실내에서도 보행기를 밀고 다녀야하는 엄마도 “영감이 저렇게 자기 방을 못 찾으니, 어떻게 하면 좋아요”라며, 걱정 한줌 보태셨다.

다음 절차와 심사 진행과정을 딸에게 설명하는 심사관의 눈빛에는 ‘모르쇠’로 일관하는 사람들에 비해 진정성과 방문요양의 필요성이 인정된다는 것으로 느껴졌다. 오랜 기간 뇌혈관질환 관련 약을 복용하고 계셨던 것도 등급 심사에 큰 참고가 된 것 같았다.

심사가 끝나고, 아버지는 긴장이 풀린 탓인지 잠시 눈을 붙이셨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나 오늘 연기 잘했지?”라며 엷은 미소를 보이셨다. “예, 아주 잘 하셨어요”라고 딸은 두 엄지를 추켜세우면서도 아지랑이 같은 뿌연 안개비로 시야가 흐려졌다. 대쪽 같은 아버지가, 자존심을 버리고 치매를 연기하시다니….

절차에 따라 의사소견서가 첨부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는 장기요양보호 인정을 받으셨다. 그 이후, 요양보호사의 방문으로 온몸이 아프고 힘이 없다는 엄마에게도 큰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수혜 당사자인 부모님뿐만 아니라 떨어져 지내는 자식들에게도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다.

우리나라는 65세 이상 노인의 비율이 전체 인구의 14% 이상을 차지하는 ‘고령사회’다. 주변에는 치매가 아니라도 몸이 불편해 도움을 필요로 하는 노인이 무수히 많다. 그렇게 스스로 생활하기에 어려움을 겪는 노인들이 편리하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리기를 바라는, 딸에게는 많은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사람은 누구나 늙고 병들기 마련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