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가 사랑한 영화] (2)극장이 변하다
[그 시절 우리가 사랑한 영화] (2)극장이 변하다
  • 시니어每日
  • 승인 2023.01.06 11: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형관의 맛을 제대로 전해준 ‘벤허’(1959)의 전차 경주 장면
대형관의 맛을 제대로 전해준 ‘벤허’(1959)의 전차 경주 장면

1895년 영화가 탄생한 후 가장 큰 위기는 TV의 출현이었다. 1950년 미국 CBS가 세계 최초로 컬러 방송을 시작하면서 관객은 급락했다. 주 평균 9천 만 명이던 미국 영화 관객이 1천 600만 명으로 줄었고, 4천여 개의 영화관이 폐점했다.

영화산업은 곧 태세를 전환했다. TV가 보여줄 수 없는 대형 스펙터클로 방향을 잡았다. 1956년 ‘십계’(감독 세실 B. 드밀), 1959년 ‘벤허’(감독 윌리엄 와일러) 등 대작 영화들은 70mm 시네마스코프 영상으로 관객들을 다시 극장으로 불러 모았다.

한국에선 1980년 컬러TV가 등장하고, 1982년 프로야구가 생기는 등 다른 여가활동이 가능해지면서 극장은 더 이상 독보적인 자리를 지킬 수 없었다. 변두리의 3류 극장부터 문을 닫기 시작했다. 중심가에는 1980년대 초 가고파, 뉴코리아, 해바라기, 푸른소극장 등 200~300석의 소극장이 유행하기도 했다.

1982년 1월 5일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되면서 이들 극장을 중심으로 새벽 2~3시까지 영화를 상영하는 심야극장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앞두고 그 서슬 퍼런 검열이 느슨해지면서 극장 안이 온통 살색과 야한 신음으로 진동하기도 했다. 소위 당시 정부의 3S 정책 때문이었는데, ‘스포츠·스크린·섹스’를 풀어 국민들의 시선으로 돌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동안 상반신도 노출할 수 없었던 한국영화가 에로티시즘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영화들이 쏟아졌다. 안소영 주연의 희대의 ‘애마부인’(1982)을 시작으로 많은 빨간 영화(?)들이 양산됐다.(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풀도록 하겠다)

대구의 소극장은 당시 갑자기 풀려난 에로영화 붐을 타고 외국의 포르노극장처럼 야한 영화를 상영하는 전용관으로 명맥을 유지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대구의 극장이 대변혁을 일으킨 것은 멀티플렉스의 등장이었다. 멀티플렉스는 한 극장에 여러 개의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복합상영관이다. 이는 스크린 벌수 제한이 풀리면서 가능해진 일이었다.

정부는 1980년대 영화 한 편당 프린트 벌수를 12개로 제한했고, 1992년까지 14개로, 1993년에는 16개로 늘었다가 1994년 프린트 벌수 제한 제도가 전면 폐지됐다. 전국 16개 극장만 동시에 상영할 수 있었던 제한이 무제한으로 풀린 것이다. 1994년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라이온 킹’이 32벌의 프린트로 서울에서만 7개, 지방에도 25개 극장을 점령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지금은 프린트벌수가 몇 천개까지 복사해 라인업으로 승부를 거는 것에 비하면 32개 프린트

로 야단법석을 떨었으니. 프린트 벌수 제한 때문에 극장은 제작사와 미리 친해 놓을 필요가 있었다. 수입사와도 마찬가지여서 인맥이 곧 좋은 영화(흥행이 될 만한 영화)를 끌어오는 구조가 됐다. 성룡 영화를 한 극장에서만 볼 수 있었던 이유다.

이때는 영화에 대한 투자 개념이 없었다. 제작자가 어떤 영화를 제작하려면 먼저 지방 극장주와 만났다. 이런 영화를 만드는데, 제작비를 좀 대라는 일종의 투자유치다. 이때 극장이 제작사에 주는 돈을 전도금이라 해서 나중의 흥행수입을 미리 전해주는, 일종의 가불인 셈이었다. 영화가 개봉 하면 제작자는 배우들은 대동해 전국 홍보에 나서는데, 저녁이 되면 술자리에 여배우를 앉히는 것 또한 당연시되던 시대였다.

프린트 벌수 제한이 만들어낸 것이 단관 형태의 대형관이었다. 최대한 많은 객석으로 빠른 시일에 흥행 수익을 거두려면 대형관이 가장 유리했다. 그러나 이 제한이 풀리면서 극장이 대 변화를 맞는다. 대형 극장보다 여러 개 관으로 쪼개 라인업을 늘리는 것이 훨씬 유리해진 것이다.

만경관이 1994년 2개관으로, 아세아극장이 1997년 2개관으로 나뉘어 씨네아시아란 이름으로 개관했다. 이후 제일극장과 아카데미가 각각 3개관과 2개관으로 변신했다. 또 1997년 대구 중앙시네마가 3개관으로 신축, 개관했다. 중앙시네마는 2000년 6개관으로 증축하면서 대구의 멀티플렉스 시대를 열었다. 중앙시네마는 그동안 대구 자본으로 이뤄져 있던 극장가에 서울 대형 자본의 진출로 위기감이 조성되기도 했다.

이후 2000년 한일극장이 7개관으로, 2001년 아카데미가 6개관으로, 2002년 만경관이 15개관으로 변신을 꾀했으나 대구극장과 자유극장, 송죽극장 등이 끝내 폐관하면서 화려한 단관시대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멀티플렉스의 등장으로 아날로그식 극장 풍경 또한 바꾸게 되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이 극장의 대형 간판이다. 극장 앞에 걸려 있는 대형 영화 간판은 1980,90년대 빼놓을 수 없는 도심 풍경이었다. 멀티플렉스로 변하면서 배우들의 대형 그림으로 영화 개봉을 알리던 간판이 사라졌다.

극장의 간판을 그리던 이들은 한때 극장 내에서 가장 좋은 대우를 받기도 했다. 배우와 최대한 닮게 그려야 하는 고난도 대형 초상화 작업이었고, 결과물 완성도에 따라 극장의 순위가 갈릴 정도였으니 극장 소유주 또한 실력 있는 이들을 찾았다. 극장 간판을 그리다가,

후에 화가로 전업해 성공한 이들도 있었다.

배우 중에 누구를 그릴 것인가는 그들의 권한이기도 했다. 그래서 배우들이 순회 홍보를 위해 지방 극장에 가면 가장 먼저 찾는 것이 그들이었다. 김지미 같은 대배우도 만경관 등에 방문하면 촌지를 주면서 ‘크게’ ‘잘’ 그려주기를 부탁하기도 했다고 한다. 간판의 크기가 정해져 있었지만, 촌지를 주는 배우들의 얼굴은 더 크게 그려 붙이곤 했다. 물감으로 직접 그리던 간판이 1990년대 후반 디지털 대형 인쇄물로 바뀌다가, 멀티플렉스로 전환되면서 현재의 대형 포스터가 자리 잡게 됐다.

단관이 사라지면서 관객들의 큰 즐거움 또한 사라졌으니 바로 대형스크린이다. ‘아라비아의 로렌스’, ‘벤허’ 등 70mm 시네마스코프 영화들을 대형 스크린으로 즐기던 시대가 사라진 것이다. 2000년 대구MBC가 개관한 시네마M이 한동안 전국 최대 크기의 스크린을 자랑했지만, 사옥 이전으로 2020년 4월 30일자로 사옥 영업을 종료했다.

물론 현재 아이맥스관이 있지만, 옛날 소극장 정도의 스크린만 범람(?)하는 시대가 됐다. 재개봉관까지 모두 대형스크린으로 장착했던 단관 시대가 어떻게 보면 훨씬 영화 감상할 맛이 나던 시대였다.

 

김중기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