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가 사랑한 영화] 김중기의 단관시절을 추억하다
[그 시절 우리가 사랑한 영화] 김중기의 단관시절을 추억하다
  • 시니어每日
  • 승인 2022.11.21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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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한일극장 학생문화교실.  매일신문 DB
1977년 한일극장 학생문화교실. 매일신문 DB

얼마 전 중학생 10여 명이 필름통을 방문했다.

미디어 교육 때문에 온 것인데, 놀란 것은 이 학생들이 DVD의 실물을 처음 봤다고 얘기한 것이다. VHS 비디오테이프야 모르는 것이 당연한데 DVD까지 그럴 것이라는 것은 생각 밖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이런 물리매체로 영화를 보는 세대는 장년대 뿐이다. 이제 대부분 가정에서는 온라인 서비스인 OTT를 통해 영화를 감상한다. 넷플릭스, 디즈니 플러스니, 티빙이나 웨이브 등을 통해 영화를 감상하니, 예전처럼 비디오 대여점을 방문해 신작 영화를 기다려 받아 두근거리며 VCR에 넣어 감상하던 일은 추억이 돼 버렸다.

오늘은 그리운 그 시절 옛날 극장을 추억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옛날 극장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냄새다. 출입구 커튼을 젖히면 항상 꾸덕꾸덕하게 오래 쌓이고 삭혀진 냄새가 훅 코를 자극했다. 칼로 긁으면 한 움큼씩 뚝뚝 떨어져 나올 것처럼 오래 쌓인 냄새다. 틀림없이 불쾌한 냄새였겠지만, 스크린에 펼쳐지는 아름답고 화려한 영화의 이미지와 그 기대에 찬 흥분이 덧대어져 그 냄새는 이제 추억의 향수가 돼 버렸다.

스페인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그린 ‘페인 앤 글로리’(2019)에서 그 냄새를 이렇게 규정했다. “내 어린 시절의 영화란 암모니아 냄새와 쟈스민 향기, 한 여름의 산들바람이었다.”

소변 냄새가 진동했지만 스크린에 펼쳐진 소피아 로렌, 잉글리드 버그만, 오드리 햅번의 쟈스민 향기와 함께 내 삶에 스며든 맑은 추억이었다는 뜻이다. 역시 대가 다운 정확하면서 아름다운 표현이다.

필자는 10대 때 중구의 대신동에 살고 있어서 가장 자주 드나든 극장이 인근에 있던 사보이, 시민, 진성, 오스카 극장이었고, 좀 더 나가 동아, 달성, 칠성 등을 갔고, 꼭 봐야 할 영화가 있다면 신천교 양쪽에 있던 신도, 신성극장까지 버스를 타고 갔다. 남문시장에 있던 대한극장이나 그 외 대도, 미도, 부민 등 대구 전 지역의 극장을 찾아 헤맸다.

이들 극장은 대부분 재재개봉관이다. 이른바 3류 극장으로 개봉관의 필름이 재개봉관을 돌아 이들 극장에 올 때쯤에는 필름에 스크래치가 나서 비가 오듯 했다. 2개 영화를 동시에 상영하기도 했다. 도원동에 있던 동아극장의 경우 가수들의 리사이틀이 자주 열리기도 했다. 학교를 마치고 오면서 동아극장에 걸린 흰 진 바지를 입은 가수 김추자씨의 뇌쇄적인 포즈의 대형 간판은 잊을 수가 없다.

1970년대 대구의 극장 수는 31개였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한일, 대구, 만경관, 아카데미, 아세아, 제일극장이 개봉관이었고, 자유와 송죽 등이 재개봉관이었다. 1970년대 말 개봉관의 입장료가 500원이었다면, 재개봉관은 300원, 재재개봉관은 200원 또는 150원 정도였다.

1977년 10월 20일 ‘전쟁의 평화’를 상영하던 만경관의 입장료가 450원, ‘타워링’을 하던 한일극장이 460원이었다. 필자의 이 당시 학생 일기장을 찾아보니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날 이 극장 저 극장을 헤맨 모양인데, 결국 돈이 모자라 영화를 보지 못했다고 일기장에 적어 놓았다. 어린 시절 돈이 없어 되돌아서는 나를 보며 안타까움이 밀려든다. 이때는 시간이 긴 대작영화는 좀 더 비쌌던 기억이 있는데, 요즘의 일괄 가격에 비해 합리적인 가격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때는 단관 시대다. 1개관에 1개의 스크린이 있던 시절이다. 그래서 대부분 1층과 2층이 열려 있는 복층 구조의 대극장이었다. 700에서 1천 석 규모로 좌석이 가장 많았던 곳이 대구극장이었다. 3층에 작은 관람석까지 있어서 1천 석이 훨씬 넘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올드 팬들은 기억할 좌석이 있었으니 바로 임검석이다. 극장 뒤쪽 VIP 관람석처럼 비치된 별도의 좌석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 순사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극장 내 동태를 파악했고, 60,70년대에는 국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야 할 책무를 가진 이들을 위한 좌석이기도 했다. 또 80,90년대에는 학교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단속하기 위해 선도 자리로 이용되기도 했다. 나중에는 관객 수를 줄여 수익금을 착복(?)하던 극장을 감시하기 위해 제작사에서 사람을 보내 관객 입장 정도를 파악하는 용도로 쓰이기도 했다. 이래저래 불쾌한 감시자의 자리였다. 임검석(臨檢席)이라는 이름부터 권위적이다.

이때 극장안은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시네마 천국’처럼 늘 담배연기가 가득했다. 영사기의 환한 불빛이 담배 연기로 일렁이는 모습은 미술 마블링작품 같았다. 그때는 비 오는 날 버스에서도 담배를 피워댔으니 극장 내부도 마찬가지였다. 그랬던 담배 연기는 1980년대 중반 사라졌다. 필자가 마지막으로 극장에서 흡연을 목격한 것은 1986년 이었다.

흑백TV조차 구경하기 어려웠던 그때는 명절날 영화 한 편 보는 것이 최대의 낙이었다. 그래서 명절이 되면 극장 앞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차례를 지낸 후 오랜만에 만난 친지들과 영화를 보러가는 것이 유일한 문화생활이었다.

스크린 수가 적고, 또 1개관에서 1편만 상영했기에 인기작의 경우 장사진을 쳤다. 명절마다 찾아오는 성룡 영화를 주로 상영했던 한일극장의 경우 매표구에서 대구백화점까지 그 추운 설날에도 긴 시간 줄을 서서 기다리기도 했다.

입석이라도 있으면 다행이었다. 여윳돈이 있으면 몇 배를 주고 암표를 사기도 했지만, 대부분 그럴 형편이 되지 못했다. 좌석은 고사하고 몸 돌릴 틈도 없이 시루의 콩나물처럼 빼곡하게 서서 영화를 보곤 했다. 당연히 소매치기도 많았다. 주머니 속에 소매치기의 손이 들락거렸다. 영화에 혼이 빠져 보다가 500원 지폐를 소매치기 당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렇게 복잡해도 주전부리를 파는 상인들은 용케 껌이나 땅콩, 오징어를 목에 줄로 맨 상자에 담아 다니며 팔았다. 요즘 극장문화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전근대적인 극장풍경이지만 그때는 당연하게 여겼다.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이때는 영화 시작 전에 양복지를 파는 사람들이 무대에 나타나기도 했다. 객석의 사람들에게 번호가 적힌 표를 나눠주고, 번호를 불러 그 사람에게 양복지를 특별 할인가로 파는 형식이었는데, 사실은 일종의 사기성이 농후한 강매였다. 어리숙한 사람의 번호를 불러, 싼 가격이라고 속여 파는 것이었다. 물론 극장측과 사전에 협의된 것이 아니었을까.

당시 영화를 보기 위해 거치는 의식이 두 가지 있었으니 애국가와 대한뉴스다. 모두 일어나 흘러나오는 애국가와 스크린의 태극기를 바라보며 애국애족을 다짐하고, 파월 용사들의 용맹함이나, 청와대의 근황, 국가의 중요시책 등에 대한 뉴스를 봐야 드디어 나의 알토란같은 돈을 주고 들어간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영화평론가

'필름통'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