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어날 추억] (84) 목화 솜이불의 향수
[꽃 피어날 추억] (84) 목화 솜이불의 향수
  • 유병길 기자
  • 승인 2022.12.2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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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같이 추위가 계속될 때 나이 많은 사람들은 솜이불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다.
목화 솜이불의 모습. 유병길 기자

 

1950~ 60년대 봉강리(경북 상주시 외서면)에서는 솜이불을 덮고 잠을 잤다. 집집마다  봄이면 목화씨를 파종하여 거름을 주고 잡초를 뽑으며 정성들여 목화 재배하였다.

 목화 줄기와 꽃, 다래, 목화송이 모습. 유병길 기자

 

목화꽃이 처음 필 때는 붉은색이지만, 완전히 피면 노란색이 되었다. 꽃이 지고 나면 파란 작은 다래가 달렸다. 다래가 도토리 크기가 될 때는 단맛이 조금 났다. 배가 고픈 아이들이 어른들 몰래 다래를 따서 먹었다. 다래가 익으면 밤송이 같이 벌어지면서 목화송이 하얗게 얼굴을 내밀었다. 목화송이 활짝 피면 흰송이를 뽑아서 발에 늘어 말렸다.

말린 목화송이의 씨앗을 제거하고 활의 줄을 튕겨 솜을 타서 피웠다. 수확한 솜은 실을 뽑아 베를 짜서 옷을 만들어 입었고, 베를 사장에 팔기도 하였다.

솜이불에 넣을 솜은 삼면을 바늘로 꿰맨 새로 만들 이불을 펴고 솜을 일정한 두께가 되도록 고루 폈다. 편 솜이 이불속에 들어가도록 뒤집어 솜을 이불속에 넣고 한쪽을 바늘로 꿰매고, 솜이 뭉치지 않도록 드문드문 꿰맸다. 그 위에 푸르고 붉은 이불 천을 놓고 바늘로 꿰매었다.

솜이불 보다 큰 이불잇을 펴고 그 위에 이불을 펴고 사방의 이불잇을 이불 위로 접어 올려 큰 바늘에 굵은 실을 끼워 이불잇을 돌아가며 한땀 한땀 꿰매면 이불이 완성되었다. 이 모든 작업은 어머니들의 작은 손에서 이루어졌다.

솜이불은 몇 년 사용하면 솜이 밀착되어 보온력이 떨어졌다. 집에서 이불 솜을 꺼내어 솜을 활로 피워 다시 솜을 놓아 이불을 만들었다.

솜이불에 쉽게 넣도록 만들어 놓은 솜. 유병길 기자

 

60년대 읍 단위에 기계로 솜을 피우는 기계가 있는 솜틀집이 생겼다. 이불솜을 가져가서 기계로 솜을 피워 이불에 바로 넣도록 일정한 넓이와 두깨의 솜를 만들어 와서 쉽게 솜이불을 만들게 되었다.

50~60년대는 옷, 이불 등 거의 모든 생활용품을 집에서 만들어 사용하였다. 70년대 이후 값싼 농산물 수입, 가내공업, 시장이 활성화되었다. 나일론 제품이 판매되면서 누에고치, 삼, 목화재배가 사라졌다.

 덮고있는 이불 3채의 모습, 오리털 이불(중간). 유병길 기자

 

가벼운 나일론 이불, 카시미롱 이불을 사서 덮게 되면서 솜이불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불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극세사 이불, 거위 오리털 이불, 누비이불, 밍크 이불, 등 여러 종류의 이불을 덮으며 살아왔다.

결혼하고 덮던 목화 솜이불은 두껍고 무거워 이불보에 싸서 고이 보관하였다. 10여 년 전 이불집에서 솜을 나누어 솜이불 두 채를 만들어 겨울이 되면 늘 애용한다는 길윤균 씨 만났다. 자녀들이 결혼할 때 혼수로 좋은 이불을 가져왔으나, 묵직하면서 포근한 솜이불을 잊을 수가 없었단다. 단독주택이라 외풍이 많지만 잠잘 때 솜이불을 덮으면 어느 정도 묵직한 무개 감도 있고 훈훈하고 따뜻하여 잠을 잘 자게 되었단다.

한파가 계속되는 요즘 나이 많은 사람들은 목화 솜이불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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