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어날 추억] (85) 사라진 문패의 추억
[꽃 피어날 추억] (85) 사라진 문패의 추억
  • 유병길 기자
  • 승인 2022.12.26 11:00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패는 집주인의 이름을 알리는 제2의 얼굴이었다.
단독주택 대문에서 어럽게 볼 수있는 문패의 모습. 유병길 기자

 

1950년대 봉강리(경북 상주시 외서면)의 새마에는 60여 가구가 살았다. 이 씨, 유 씨, 정 씨, 김 씨, 박 씨가 많이 살았다. 먹거리가 부족하여 배부르게 먹을 수가 없었다. 성씨가 달라도 다 친인척같이 정답게 살고 있었다. 60년대부터 먹고살기 위하여 젊은 사람들은 처자식을 데리고 서울로 서울로 농촌을 떠나갔다.

작천댁, 진사댁, 면장댁은 좋은 문패가 달렸다. 괴목(회화나무)의 두꺼운 판자에 조각칼로 글자가 튀어나오게 새겨 만든 문패였다. 그 외 모든 농가는 대문에서 잘 보이는 집 기둥이나, 흙벽에 크고 작은 직사각형 송판에 붓글씨로 한문 이름을 써서 자기의 얼굴을 알리듯  달았다.

70년대 통일벼가 확대 보급되고 농촌의 삶이 좋아지면서 좋은 문패를 만들어 달게 되었다. 이때 제일 비싼 문패는 자개로 이름을 새겨 만든 문패였다. 80년대 도시나 농촌에서 주거환경 개선으로 한옥을 철거하고 슬라브 2층 양옥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문패 달기가 활성화되었다.

새집을 사서 이사 오는 집주인은 문패부터 달아 자기의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이때부터 한문 문패에서 한글 문패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문패는 우편 배달 외 다른 배달이나 처음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

아파트 보급이 확대되면서 동 호수가 문패의 기능을 대신하기 시작하였다.

행정안전부, 지자체에서 제작한 도로명 주소 패.

 

도로명주소는 1995년 시범사업, 2009년 전면개정, 2011년 7월 29일부터 2013년 12월 31일까지는 기존 지번 주소 병기를 허용했으나, 2014년 1월 1일부터는 토지대장을 제외한 모든곳에 도로명주소를 쓰게 되었다.

도로명 패가 대문에 달리고, 휴대전화가 확대 보급되고, 개인정보 보호 차원에서 문패가 사라졌다. 아파트 단지외 단독주택 지역에도 겨우 1~2% 문패가 대문에 있는 실증이다. 농촌 지역에도 문패가 사라졌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