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어날 추억] 86 어린 시절 살았던 집과 요즘의 집
[꽃 피어날 추억] 86 어린 시절 살았던 집과 요즘의 집
  • 유병길 기자
  • 승인 2023.02.09 17: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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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에 떨어져있던 부엌 아궁이, 공동우물, 화장실, 욕실이 집안에 들어오면서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다.

 

1901년 친구의 증조부가 분가를 하면서 지었다는 초가집. 마루는 50년대 설치.
유병길 기자

 

1950~60년대 봉강리(경북 상주시 외서면 봉강리)는 몇 집은 기와집이었지만, 대부분의 농가는 초가집이다. 그때 집의 구조는 부엌, 큰방, 작은방, 앞에 마루가 없는 3칸 집이 대부분이다. 큰 집은 부엌, 큰방, 골방, 작은방, 앞에 마루가 있는 4칸 집이고 부잣집은 사랑채가 있다.

한옥의 방은 2개인데 주로 3대가 한집에서 살다 보니 방이 부족하였다. 한방에서 5~6명 잠을 자는 것은 보통이었다. 사랑채의 방은 할아버지 할머니 큰손자가, 사랑채 작은 방은 작은아버지 셋이 자고, 안채 큰방에는 아버지 어머니 어린 동생들, 골방에는 고모들과 누나가 잤다. 안채의 대청마루는 늦은 봄부터 가을까지 쉬는 공간이고 식사를 하는 곳이다. 큰아들은 결혼하면 같이 살고 작은 아들은 결혼하면 집을 지어 분가를 시켰다.

큰방 아랫목에는 이쪽 벽에서 저쪽 벽까지 연결된 두 개의 서까래(둥글고 긴 나무) 위에는 성주 단지, 옷을 넣은 작은 고리짝 2~3개를 얹어 두었다. 아래 벽에는 긴 대나무 양쪽에 끈을 매어 벽에 박은 두 곳의 못에 묶어 횃대를 설치하여 옷을 걸어 두었다. 시집오는 새댁들은 넓은 천에 스위트홈(SWEET HOME)이라는 영어로 수를 놓아 횃댓보를 만들어 횃대 위를 덮어 먼지가 앉지 않도록 하였다.

기와집이든 초가집이든 벽지는 못 바르고 일 년에 한 번씩 가을에 흙물을 벽에 발라서 애들이 낙서하고 손때 묻어 더러워진 부분을 겨우 지웠다. 60년대 신문지를 바르다가 벽지를 사서 바르기 시작하였다.

그때 한옥의 방문은 문종이로 바른 방문을 달고 생활을 하였다. 아이들이 많은 집은 문종이가 찢어져서 바람이 들어왔다. 가을이 되면 집집마다 찢어진 방문의 문종이를 새로 발랐다.

공동우물에서 항아리에 물을 담아 머리에 이고 와서 부엌 물단지를 가득 채워 종일 먹는 물로 사용하였다.

부엌은 문밖에 나가야 했다. 부엌에 나가서 아궁이에 나무로 불을 때어 밥을 지어야 방바닥이 따뜻했다. 부엌은 아궁이에서 불을 때기 때문에 마당보다 50~60cm 정도 낮아 어른들이 더나 들기에 힘이 들었다.

화롯불은 아궁이에 불을 때어 밥을 짓고 방을 따뜻하게 난방하던 시절에는 안방, 사랑방 복판에 자리 잡고 있던 생활필수품이었다.

화장실은 마당가와 대문 밖에 따로 있었다. 그때 거름의 원료는 사람의 똥오줌과 가축의 똥오줌이었다. 원료를 많이 확보하기 위하여 집집마다 집 안과 대문 밖에 화장실 두 개가 있었다. 대문 밖 화장실은 남자들이 사용하였고, 길을 가다가 급한 사람이 일을 보게 하는 곳이다.

50~60년대 백원역과 상주역은 먹고 살기위하여 농촌을 떠나 서울로 가던 탈출구였다.

가을에 벼 탈곡 작업이 끝나면 추운 날씨에도 양지 바른 쪽에 앉아서 며칠 동안 이엉을 엮었다. 지붕을 다 덮을 만큼 이엉을 엮으면, 친척 이웃 간에 서로 품앗이로 지붕에 이엉을 이는 날을 잡아서 새 이엉으로 지붕을 덮었다.

1973년 슬레이트로 지붕 개량한 모습. 유병길 기자

 

1973년 슬레이트로 지붕 개량한 모습. 유병길 기자

 

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 운동이 불같이 일어 초가지붕이 슬레이트 지붕, 시멘트기와 지붕으로 바뀌었다. 70년대 초에는 봉강리 새마에도 전기가 공급되어 별천지 같은 밝은 세상이 되었다. 전기가 들어오자 시골 마을에도 주거환경이 개선되고 살기 좋은 농촌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애지중지하던 등잔과 호롱은 민속촌이나 박물관에 전시된 것뿐이다.

72년도부터 재배하기 시작한 통일벼는 일반 벼보다 두 배가 더 생산되어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배고픔의 고통에서 벗어나 쌀밥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어 행복하였고 잘 살게되었다. 초가지붕은 민속촌에서 볼 수 있다.

1980년대 대도시에서 붉은 벽돌, 시멘트 벽돌로 방 거실 부엌 욕실 벽을 쌓고 철근을 깔고 시멘트를 부어 슬래브 지붕의 1층 양옥집을 짓다가 그 위에 다시 벽을 쌓아 2층 양옥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아파트 단지가 우후죽순처럼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농촌에도 연탄보일러가 설치되고 입식부엌 개량 자금이 지원되면서 목욕탕도 설치가 되어 생활환경이 개선되었다.

부동산가격이 많이 올라 복부인이 탄생하였고, 1990년대 시골에도 양옥 슬라브집 신축 붐이 일기 시작하면서 부엌, 화장실, 욕실이 공동우물이 다 들어오게 되었다.

슬레이트가 발암 물질이라는 것을 알고 2000년대 슬레이트 지붕을 보조금을 주면서 철거하기 시작하였다.

농촌의 넓은 들판에 대형, 초고층 아파트가 자리를 넓혀가도 쌀은 남아도는 현실이다.

2013년 슬레이트 집을 철거하고 신축한 주택의 모습. 유병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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