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32)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32)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1.10.04 1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양손을 맞잡아 배꼽언저리에 얹어 발을 구르며 어쩔 줄 몰라 한다
‘을’의 입장을 예상치 못해 시도조차 않았다
아녀자의 헛헛한 다짐이라 그런지 초로의 눈물처럼 하찮은 명세 정도로 여겨졌다
9월 22일 한가위를 만 하루 지난 보름달이, 디아크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9월 22일 한가위를 만 하루 지난 보름달이, 디아크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끝순네~ 저~기! 저~ 우리 집에...! 우리 큰 아들이 시방 다 죽어 가네! 생떼같이 내 아들이 다 죽어 가네! 배가 아파서 다 죽어간다네! 내 마음에 의원은 십리 만치 있고 무당도 오늘 집을 비웠다고 하네! 그 어디에도 아들의 이마를 짚어 명복을 빌어 줄 이가 없네! 그런데! 그런데 나는 어떡하라고! 그런데 우리 큰 아들이 죽어 가는데 나는 어떡하라고! 깔딱 숨이 넘어가는데 이 어미란 년이 있으나 마나네! 부탁이네! 내 이리 부탁함세! 우리 집에 가서 우리 아들 이마라도 한 번 짚어주게! 이 모두가 천벌을 받은 듯 다 내 잘못이네! 내 모진 이 업보는 후일 백배, 천배 아니 만 배로 갚아 줌세!”하며 책임지지도 못할 말을 횡설수설, 두서없이 지껄인다. 죄수처럼 고개를 마냥 주억거리며 양손을 맞잡아 배꼽언저리에 얹어 발을 구르며 어쩔 줄 몰라 한다. 할머니의 얼굴조차 쳐다볼 용기조차 없는지 눈물이 가득한 눈은 주구장창 땅바닥만 훑어 안절부절 못한다.

할머니도 단순히 감골댁 자신에 대한 어려움이나 하소연이었다면 돌부처라도 된 듯 매몰차게 내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헌데 아들이, 아이가 아프다고 했다. 따지고 보면 동병상련의 처지다. 그렇다고 기다렸다는 듯 선뜻 나설 수는 없었다.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듯 병든 고모도 시원스레 못 고치는 처지다. 이는 주워들은 풍월로, 어깨 너머로 배운 의술이라 한계가 있는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영 맹추는 아니었다.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읽고, 식당 개 삼년이면 라면을 끓인다고 그동안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의원과 무당 집 문턱을 넘나들다보니 할머니도 어느 정도 병 구환에 관한 기초지식을 익히고 있었다. 진맥정도는 어느 정도 가능했다. 어설프게나마 의원을 흉내 정도는 낼 줄 알았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아들아 앓아눕자 감골댁이 낮도깨비모양 찾아와 생떼를 쓰고 있는 것이다. 죽을병이 든 것이지 단순한 배앓이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미인 감골댁이 눈물콧물을 샘솟듯 흘려 저리 사정하는 것으로 보아 상태가 예사롭지 많은 않은 듯싶어 저기 당황스럽다.

감골댁이 말한 것처럼 의원이나 무당을 이 시간에 청하려면 불가능하다. 2~3(약 1Km)리 정도거리에 이웃한 의원은 고령에다 약하기는 하지만 풍까지 살짝 겹치다보니 걸음걸이조차 민망한 지경이다. 게다가 재 너머 사는 무당은 감골댁이 알고 있는 그대로 오늘 십리(4Km)만치 떨어진 곳에 내림굿이 있다며 안날저녁나절부터 집을 비운 상태다. 가는 날이 장날인 샘이다. 감골댁도 아들이 배를 움켜잡고 앓아눕자 사람을 놓아 나름대로 알아본 모양이었다. 하지만 집안 식구들의 재주로는 눈을 허옇게 까뒤집어 떼굴떼굴 구르다 사지를 쭉 뻗은 아들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연락이 닿은 의원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기는 싫었던 모양이다. 정신조차도 온전치 못한 의원을 진정 믿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육신조차 병마에 찌들어 감당할 수 없는 의원이다. 말이 의원이라 칭하여 내건 간판이지만 이미 내린 거나 진배없었다. 간혹 미리 만들어 놓은 환이나 몇 알을 파는 정도가 전부다. 그러자 그 어디에도 비빌 언덕이 없어진 감골댁이었다.

난감해진 감골댁이 머리를 가로세로로 내저어 생각해 낸 것이 할머니였다. 감골댁도 나름대로 고민이 깊었을 것이다. 지난 날 본인이 진심을 담을 듯, 장난삼아 한 짓거리가 뒷덜미를 움켜잡는다. 한치 앞을 모르는 것이 사람의 앞일이라고 할머니를 험담한 세월이 고스란히 남아 양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발목에 쇠사슬을 감은 듯 옴짝달싹 못하게 얽어매고 있다. 얽히고설킨 세월 속에 늘 ‘갑’인 줄 알아 아직 화해의 손길조차 내밀지도 않았다. ‘을’의 입장을 예상치 못해 시도조차 않은 것은 물론 여전히 할머니를 미치고 돌았다며 설레발을 치고 있다. 온 동네를 미꾸라지 한 마리가 흙탕물을 일으키듯 휘저으며 다니고 있다. 스스로 생각해도 염치가가 없고 얼굴에 철판을 깔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여겼다.

하지만 자식의 죽음 앞에 찬 밥 더운 밥,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못 되었다. 불구덩이고, 사지(死地)고, 호랑이 아가리고, 생각이고 자시고가 없었다. 화약통을, 섶을 지고 불속에 뛰어들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여겼다. 화톳불을 본 부나방이 되기로 한 것이다. 어머니라면 당연히 그래야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할머니의 태도는 등줄기에다 시멘트콘크리트를 친 것처럼 뻣뻣하기만 하다. 할머니의 꼿꼿한 태도로 보아 떠난 버스를 향해 손을 내젖듯 공허하다 여겼다. 절망이란 심연으로 깊숙이 가라앉는 듯 글렀다 싶었다. 입은 화를 불러오는 문이고 혓바닥은 자신을 베는 칼이라 했다. 지난날 생각 없이 지껄인 말들이 아들을 죽으로 몰아간다 생각하니 벌겋게 단 인두로 입을 지지고 싶었다. 올이 굵은 실을 대바늘에 꿰서 촘촘하게 꿰매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그렇다고 예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대로 빈손으로 갈 수는 없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딱히 할 수 있는 거라곤 버티기 밖에 없는 감골댁은 옷고름을 접어 쥔 손으로 애달캐달 하염없이 눈물콧물을 훔치며 서있는 장승이 된다. 속옷 고쟁이가 훤히 들어나는 것도 모르고 치맛자락을 끌어 올려 코를 감싸내려 인중과 입술언저리를 습관처럼 훔치다 끝내는 애타는 마음에 발을 동동 구른다. 밑 터진 속옷 고쟁이가 삐딱하게 벌어져 벌겋게 엉덩이가 들어나는 것도 모르는 듯 자꾸만 치맛자락을 잡아당겨 얼굴을 훔친다. 평소라면 어림없는 이상야릇한 꼴로 마당이 비좁도록 발을 총총 구르는 감골댁이다. 할머니의 눈에 어딘가 모르게 기시감이 드는 초라한 몰골이다. 그 옛날 고모가 어렸을 적에 할머니가 마당을 비좁도록 오가며

“의사선상님 불쌍한 저 어린 것! 저 가엾은 저 우리 딸 좀 살려 주이소! 제발 좀 살려 주이소!”하고 의사들에게 간청하던 그때가 오버랩 되고 있었다. 과거의 화상 속에 빠져든 할머니가 진정으로 안쓰러웠는지 무심코

“이보게 그~기 뭔 꼴불견 같은 꼬락서니고? 치맛자락이나 좀 내리던가 하지 않고...! 남들이 볼까 내 얼굴이 다 화끈거리네! 그건 그렇고 어떻게 된 내력인지 내력이라도 찬찬히 말해보게”한다.

감골댁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게 진정 할머니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싶어 빤히 쳐다보다간 손에 잡아 마냥 잡아 끌어당기던 치맛자락을 놓아 툭툭 털고선

“예~ 예!”하며 자신도 모르게 “예! 예”하고 존댓말이다. 그동안 미친년, 정신이 나간 년, 머리가 돌아버린 년 등등 온갖 악담과 험담으로 일관하던 때와는 달리 자신도 모르게 존댓말이 입으로부터 불쑥 튀어나온다. 감골댁도 내가 왜 이러는가 싶어 속으로는 저기 당황스러웠지만 아무려면 어때, 바로 잡는다는 핑계를 들어 꾸물거리다가 할머니가 없던 말로 도로 주워 담을까 싶어

“예~ 예! 그라믄입소!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라믄입요!”하는데 울던 울음이 단숨에 멈춰지고 이제 존댓말은 당연하다 여겼다.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듯, 황달기운이 노랗게 돌던 얼굴 가득히 발그스레하게 화색이 깃든다.

할머니 자신도 깜짝 놀랐다. 이렇게 싶게 무너질 수가 있는가 싶어서다. 진짜로 정신이 해까닥 나갔나 싶었다. 정월 대보름의 뒤치다꺼리가 끝나던 날 밤을 생각한다면 이럴 수는 없는 것이라 자책이다, 입술에 피가 나도록 깨물고 짓 물어가며 시퍼렇게 날을 세운 마음속의 칼이 ‘쨍그렁’부러지는 느낌이다. 금강석처럼 철석간장으로 다짐했던 마음이 봄날 눈 녹듯 녹아진다는 생각이 든다. ‘남아 일언 중천금’이라지만 아녀자의 헛헛한 다짐이라 그런지 초로의 눈물처럼 하찮은 명세 정도로 여겨졌다.

그런 한편으로는 무당이 말한 동네 사람들과의 화해의 첫걸음이 이런 것인가 싶기도 했다. 이것이 그 시작의 단초라면 어떠한 욕설에 손가락질도 달게 받아들이라 마음먹었다. 이는 할머니의 처지를 생각할 때 본인의 고집만을 내세워 버터 갈 처지가 못 된 때문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