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37)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37)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1.11.08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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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승줄에 꽁꽁 묶이고 보니 원수가 따로 없었다
생전에 쏘아 붙였던 그런 말들이 목에 걸린 생선가시처럼 아프다
지난 날 배우고 익힌 지식을 총동원하는 할머니다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계림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계림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疏而不失:하늘의 그물은 크고 넓어 엉성해 보이지만 놓치지 않는다)이라고 범죄자가 도망가서 숨을 곳은 지구를 통틀어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은 일거에 법망에 걸려들었다. 고위공무원과 파출소 소장 등이 그들의 뇌물을 받아먹고는 뒷배로 개입되었지만 그들의 악독한 행동이 자승자박으로 자멸로 몰았다. 권선징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진실을 일깨운 것이기도 했다. 한순간의 판단착오로 새끼줄로 굴비 엮듯이 주렁주렁 포승줄에 묶여 감옥소로 직행이다.

야밤을 틈탄 쥐새끼들처럼 은밀하게 홍등가를 들락거릴 때는 형님동생으로 더할 나위 없이 친한 사이였다. 굳게 언약한다는 뜻에서 술잔에 피를 나누어 마신 탓에 도원결의까지는 아니더라도 삽혈동지라면 죽을 때는 같이 죽자 맹세한 그들이다. 하지만 포승줄에 꽁꽁 묶이고 보니 원수가 따로 없었다. 얼굴가득 인상을 그리고 송곳니를 드려내어 억울하다며

“철딱서니 없는 것들...! 근본 없는 놈들이 하는 짓이라곤...! 네 놈들의 무모한 짓거리 때문에 이게 무슨 꼴 같지 않는 꼬락서니야!”하고 눈을 부라려보지만 능글맞은 미소를 띤 그들은

“아따 왜 이러십니까? 다 아실만한 분들께서! 정녕 독약이 든 사탕인줄 모르고 줄줄 빨아서 달게 드셨습니까? 성배에 독이 든 줄 모르고 꿀물 마시듯 마셨습니까? 아마추어처럼...!”하고 비웃는 데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명예를 얻고자 밤잠을 반납하여 책을 벗 삼은 일이 나무아미타불이다. 집안을 일으키고자 지문이 지워지도록 손바닥을 비벼가며 아부를 떤 것도 모자라 허리띠를 졸라맨 일이 공염불이 되었다. 목민심서를 탐독하고 청백리를 흉내한 가면이 벗기진 지금 십년공부 또한 도로 아미타불이다. 일순간에 부귀영화가 물을 건너갔다. 그것도 모자라 은팔찌를 손목에 차고는 같은 범죄자로 전략이다. 그 어디에도 하소연 할 곳이 없다. 그런 못된 인간 같잖은 인간들의 검은 돈 몇 푼 받아 쳐 먹고 천산갑이 철갑을 뒤집어쓰듯 비호했다는 손가락질뿐이었다. 한 때는 부하직원들을 줄줄이 거느려 떵떵거렸지만 더 나쁜 놈이라며 앞길에 때 아닌 날계란 세례다. 게다가 차가운 간방으로 향해가는 그들 무리의 뒤통수로는

“이런 쳐 죽일 놈 같으니! 검은 돈 달게 쳐 먹고 굵은 똥 잘 쌌느냐!”는 원망만 가득하다.

그런 와중에도 배냇소 주인은 얼마간의 재산을 건졌다. 원래 도박자금은 전액 국가로 귀속이다. 하지만 그의 친척 중 저 위쪽으로부터 입김이 상당한 사람이 있어 도둑맞은 물건이란 명분으로 집문서와 땅문서 일부를 찾은 때문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상거지차림으로 고향 땅을 다시 찾아 든 그들의 무리 속에는 당연히 있어야할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그는 고향보다는 그간의 죄를 속죄한다는 뜻에서 타향에서 날품팔이로 살다가 돈을 벌며 그때 돌아오겠다고 했다.

막 도착한 그들 가족이 마주한 당면한 과제는 굶주린 배를 채우는 일이었다. 이를 능히 짐작한 할아버지는 득도, 공도 없이 손해만 본 배냇소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없이 보리쌀 한 포대기를 선뜻 건넸다. 할머니가 우리 집도 굶은 판에 웬 선심이냐고 막아섰지만 이웃끼리 그만한 정은 이어야 한다며 부득불 우겨서 건넸다. 집안에 부처님 나셨다고 비꼬아도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착하기만 했던 할아버지였다. 후일 배냇소 주인은 그때 그 일이 머릿속에 아로새긴 듯 고맙고 비록 사기도박꾼의 한입에 재산을 홀랑 털어 넣었지만 배냇소를 키워준 공을 잊지 않아 몇 곱절로 환산한 쌀을 보내주었다. 그때도 할머니는

“사람이라면 응당 그래야지”하며 배냇소가 송아지를 낳았더라면 더 이문이 남았을 것이라며 고마움보다는

“복 없는 팔자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하며 팔자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헌데 막상 할아버지가 세상을 뜨고 나자 할머니는 그때 그 모진 말들이, 특히 “자선 사업가 운운...!”하여 생전에 쏘아 붙였던 그런 말들이 목에 걸린 생선가시처럼 아프다. 말을 안 해도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싶은 게 후회가 드는 것이다. 부부는 사랑과 아픔을 번갈아 함께 할 때 진정한 정이 싹튼다고 했던가? 오랜만에 맡아보는 농익은 소죽냄새에 이끌린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어깨를 나란히 다정스럽게 고구마를, 감자를, 알밤을 구워 먹던 그때가 눈앞으로 선선하게 떠오른 모양이었다. 까맣게 탄 껍질을 벗긴 까만 손으로 옆구리를 뚝딱 내지를 때 실타래처럼 오르는 김 속에 아련하게 자리 잡은 노란 속살의 고구마 같은 향수였던 모양이었다.

“야속한 영감님 같으니! 갈려면 같이 가든 가 않고! 백년을 하루같이 살자며 새끼손가락 걸어 약속하더니 만...! 왜? 나만 홀로 남겨 두고 바람처럼 가셨나요? 하얗게 봉오리지어 핀 토끼풀꽃을 곱이 뜯어 풀꽃가락지를 만들어 약지에 끼워주며 행복하자 맹세하더니 어이 홀로 남겨두고 가셨던가요? 그렇게 홀로 떠날 거라면 초례청을 넘겨다보며 합환주는 어이 또 나누어 마셨던 가요! 당신 한 모금, 나 한 모금, 설탕물을 마시듯 어이 다정하게 나눠 마셨던 가요! 날이 저물어 도깨비불이 문밖에서 일렁거리는 밤이면 밤마다 따뜻하게 잡아주던 그 손길은 어이 잊으라고 먼저 가셨던 가요! 고생했다. 어여쁘다며 귀밑머리는 왜 또 그렇게 다정하게 쓸어 주셨던 가요! 야속하네요! 나도 좀 데려가지 않고요! 세상살이에 몸이 고단하네요! 마음이 지치네요! 나도 저 끝순이만 아니면 당장이라도 따라가고 싶네요! 영감이 구워주는 가슴 따뜻한 노란 고구마가, 희뿌연 달빛아래 박꽃처럼 부서지던 감자의 하얀 분말이, 노란알밤이 자지러지도록 먹고 싶네요!”하고 할머니는 가슴속 깊이 묻었던 옛 향수를 하나하나 꺼내 보석을 닦아가듯 애틋하게 읊조린다. 그렇다고 마냥 지난 향수에 취해 있을 수는 없었다. 소죽솥이 쏟아내는 향기에 취해 숙였던 고개를 들자 부엌으로부터 밥 타는 냄새가 솔솔 흘러나온다. 하지만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은 눈치였다. 모든 것이 정지된 듯 고요한 가운데 배를 양손으로 옴켜잡은 아이만 멍석 중앙으로 늘어져

“아이구 배야! 아이구 배 아파라!”하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끙끙 앓고 있다.

잠시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할머니는 황급히 감골댁의 아들 앞에 자리를 하고 앉아 곧장 손을 내밀어 배 위에 올렸다. 여전히 ‘쿡쿡’쑤시고 찢어질 듯 아픈지 ‘꾹꾹’눌러서 밀어내는 아이의 손 밑으로 생으로 찔러 넣은 손으로 배의 건강 상태를 살피는 할머니다. 무념무상의 숭고한 시간이 흐르고 있는 순간이기도 했다. 처녀 진료라 한참이나 긴장이 되는지 할머니의 이마로 때 아니게 송골송골 땀이 맺힌다. 그러게나말게나 손끝에 온 신경을 집중하여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김 할머니다.

이럴 때 의원은 진맥 후 무어라 알려주었던가? 무당은 손끝에서 무엇을 감지하여 멍청이라 꾸짖어가며 세세하게 병명을 말해 주었던가? 애는 어째서 이토록 배가 아플까? 이놈 아의 뱃속에서는 시방 어떤 기막힌 일이 벌어지고 있어 주리를 트는 듯 아픈 것일까? 손끝으로부터 전해오는 뜨뜻미지근한 온기를 느껴 머리를 쥐어 짜가며 지난 날 배우고 익힌 지식을 총동원하는 할머니다.

가끔 의원은 할머니를 불러 진맥한 결과를 알려 주고는 손끝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무당도 환자의 배를 진맥하여 병명을 알아냈을 때 선심을 쓰듯 할머니의 손을 잡아서는 심안이 눈을 뜰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 대가를 몸으로 충실히 벌충을 해온 할머니는 고모 때문에라도 더 열심히 배우고자 노력을 경주했었다. 그래도 그때는 선생님이나 사부까지는 아니더라도 옆에서 조언과 리드를 하는 대로 따랐기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롯이 할머니가 지닌 지식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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