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째 치매 어머니 돌보는 권오후 노인복지 전문가
16년째 치매 어머니 돌보는 권오후 노인복지 전문가
  • 강효금· 이원선 기자
  • 승인 2021.09.18 21:5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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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달서구 치매안심센터 치매 가족 모임인 자조모임 회장으로
어머니 돌보며 얻은 경험과 지식 나누고
치매 환자와 가족, 노인복지에 남은 열정 바치고파
그는 노인장기요양보험의 체험 수기 모집에서 여러 차례 입상한  적이 있는 재주꾼이기도 하다.  이원선 기자

 

대구광역시 달서구 치매안심센터 치매가족 자조모임회장이자, 사회복지사로 노인복지 관련 일을 하는 권오후(63) 회장의 일과는 분주하다. 오전에는 달서노인종합복지관에서 문화예술 관련 상담을 하고, 오후에는 한국시니어연구소 대구지점으로 자리를 옮긴다. 퇴근하면 어머니 서옥선(87) 씨가 기다리는 집으로 향한다. 어머니는 이십여 년 가까이 치매를 앓고 있다.

-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며 어머니를 집으로 모시기로 결심

▶ 저는 2남 4녀 중 둘째입니다. 18년 전,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졌습니다. 수술 동의서에 서명해야 하는데, 차남인지라 형님의 의견을 물어보고 주위에 조언을 구하느라 지체하고 말았습니다. 중환자실에서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는데, 마지막 말씀이 어머니를 데려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도 어머니는 경증 치매 증상을 보였습니다. 아버지의 그 말씀이 제게는 어머니를 부탁한다는 얘기로 들렸습니다.

- 소녀 가장이던 어머니

▶ 어머니는 열 살 때, 사고로 부모님을 여의고 어린 동생들을 책임져야 했습니다. 이집 저집 눈치를 보며 떠돌아야 했던 어머니에게 ‘가족’은 지켜야 할 소중한 존재입니다. 차남인 제게 유난히 많은 정을 쏟은 어머니. 어머니에게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지켜야 할 성(城)이었습니다. 남편을 잃은 충격에 일에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불안해하며 기억력과 판단력이 흐려지던 어머니가 길에서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저혈당 쇼크였습니다. 당뇨에, 고혈압에 누군가 어머니를 돌볼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모두 바쁘게 사느라 어머니를 모실 형편이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문득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처음에는 대구에 있는 수녀님이 운영하는 한 병원에 어머니를 모셨습니다. 요양병원으로 모시자고 했을 때 어머니의 그 슬픈 눈빛이 제 마음을 파고들었습니다. 가족의 동의를 얻어 어머니를 집으로 모셔왔습니다.

- 점점 변해가는 어머니

▶ 시청 공무원으로 근무하며 주로 문화예술 분야 쪽에 일을 담당하던 저는 퇴근 시간이 되면, 동료들의 양해를 구하고 서둘러 집으로 향했습니다. 온종일, 나만을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 현관문을 열면 달려와 어린아이처럼 반기는 어머니. 그렇지만 알츠하이머라는 질병은 조금씩 어머니의 모든 것을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어떤 날은 틀니를 옷장 깊이 감추기도 하고, 약을 먹자마자 먹은 사실을 잊어버리고 다시 한 봉지를 더 먹기도 하고. 커피포트를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 활활 태우기도 하고. 시간이 지나며, 자신의 뺨을 때리며 자학하는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년이 죽어야 해. 죽어야 해”라며 자신의 뺨을 후려치고 또 후려치는 모습은 제가 알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아는 이에게 주간보호센터를 추천받았습니다. 그곳에 다니며 해맑게 하루 일을 전하며, 어머니는 조금 나아지는 듯했습니다. 공격 성향이 조금 잠잠해지던 어느 날, 어머니의 ‘배회’가 시작됐습니다.

모든 가족이 잠든 새벽, 장롱을 열고 옷가지를 챙긴 어머니는 보따리를 들고 집을 나섰습니다. 관리사무소를 통해 방송하고 경찰서에 신고하고, 정신없이 어머니를 찾아 헤맨 끝에, 집에서 한참을 떨어진 데에서 어머니를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는 야쿠르트 배달 아주머니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오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남의 집 앞에서 소변을 실수하고 어쩔 줄 몰라 앉아 계신 어머니를 찾기도 했습니다. 현관문에 이중 잠금장치를 하고, 전문가들에게 도움도 구했습니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으며, 저는 가정에서 최대한 어머니가 안정적으로 도움을 받을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형님과 동생들은 요양병원에 모시기 주장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저와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그 말에, 어머니는 세상을 다 앓은 듯 쓸쓸한 눈으로 바라보셨습니다. 가정· 가족· 자식이 어머니에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기에, 저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기로 했습니다.

어머니 서옥선 씨와 함께한 권오후 회장.   권오후 회장 제공
어머니 서옥선 씨와 함께한 권오후 회장.  어머니는 여전히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을 가장 좋아한다.  권오후 회장 제공

 

- 사회복지, 그중에도 노인복지에 관심

▶ 어머니를 돌보며, 제가 노인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야간으로 대학원을 다니며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석사 학위도 받고, 요양보호사 자격증도 얻었습니다. 제가 어머니를 돌보며 한 많은 실수를, 다른 사람들은 되풀이하지 않도록 도움을 주고 싶었습니다. 달서구치매안심센터의 치매 가족 모임인 자조모임에서 회장을 맡았습니다. 치매 가족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고 싶어, 예술단을 초청해서 공연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자조모임에 갈 때는, 코로나 이전에는 꼭 어머니를 모시고 갔습니다. 모두 치매 가족을 돌보고 있기에, 자기 부모님처럼 인사도 하고 말도 건넸습니다. 어머니는 그 시간을 즐거워하셨습니다. 치매 환자에게도 사람들의 접촉이, 따뜻한 스킨십이 중요함을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 겨울나무처럼 말라가는 어머니

▶ 어머니는 이제 몸을 거의 움직이지 못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정신은 맑고 투명합니다. 제가 이야기를 하면 알아듣고, 대답하려 애씁니다. 입을 다물지 못하는 어머니를 보며, “엄마, 입 좀 다물어야지. 그래야 밤에 편하게 잘 수 있어”라고 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지만 몇 시간 뒤에 입을 다물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매번 석션해서 가래를 빼낼 때면, 힘들어하면서도 엄마 조금만 참자는 제 말에 몸을 맡기십니다. 몸은 비록 겨울나무처럼 앙상하게 말라가지만, 마음은 변함없이 자식과 연결된 것이지요. 이제 어머니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합니다. 어머니가 세상 여행을 마무리하는 그날까지, 편안하게 가족들 품에서 지내시길 소망합니다.

- 16년의 의미

▶ 흔히 알츠하이머, 치매는 돌보는 가족의 영혼까지 잠식한다고 얘기합니다. 저 역시 긴 시간을 보내며,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는 생각. 차라리 끝내고 싶다는 생각. 그때마다 나를 견디고 버티게 한 것은 어머니의 사랑이었습니다. 장터 모퉁이에서 땅콩 껍데기를 벗겨, 연분홍 속살을 드러낸 땅콩을 입에 넣어주던 어머니. 내가 안아드리면 입가에 미소가 번지던 어머니. 그 사랑이 저를 긍정의 힘으로 다시 무장하게 했습니다. 저는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어머니를 돌보며 배운 노인복지로 정년퇴임 후에도 봉사활동도 하고 돈도 벌고, 이만하면 성공한 삶이지요.

권오후 회장은 요양병원의 개인 간병비는 치매 환자의 가족에게 너무 큰 부담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자신의 어머니 같은 경우에는 단체 간병이 아닌 개인 간병을 해야 하는데, 그럴 경우에 하루 간병비만 12만 원. 한 달에 400만 원에 가까운 돈을 지불해야 한다. 치매 가족을 위해서라도, 개인 간병비를 국가 차원에서 어느 정도라도 지원해 줄 방안을 찾아봐 달라는 얘기를 꼭 하고 싶다고 했다. 치매국가책임제를 내세우며 지역마다 치매안심센터가 있다. 하지만 여전히 사각지대가 존재하고, 그 사각지대를 채워줄 자원과 세심한 계획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