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시장' 교동시장 60년 터줏대감 정용학 씨
'도깨비시장' 교동시장 60년 터줏대감 정용학 씨
  • 박영자 기자
  • 승인 2021.01.25 16: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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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미제물품 팔던 양키시장
시계 수리하며 옛 추억 되새긴다
교동시장에서 60년 동안 시계점을 운영해온 정용학 어르신. 박영자 기자
교동시장에서 60년 동안 시계점을 운영해온 정용학 어르신이 헌 시계를 닦고 있다. 박영자 기자

 

"16살 어린 나이에 먹고 살고 공부하기 위해 이 곳에 첫 발을 내디뎠는데 강산이 여섯 번이나 변했네요."

그는 지금도 한 평 정도의 가게에서 시계 수리를 하고 있다. 시계 배터리를 갈아 넣어주는 일부터 고장난 시계를 고쳐주고 헌시계를 반질반질하게 닦아서 새시계처럼 만들어 주는 일을 하고 있다. 대구 중구 교동시장 길광당 정용학(77) 어르신은 어쩌다 오는 손님들과 옛이야기도 하고 소일하는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며 교동시장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았다.

6.25전쟁때 피난민들이 대구역 주변에 몰려 살면서 당시 교동시장과 동문동 일대는 자연스레 상권이 형성되었다. 미군부대PX에서 흘러나온 미제물품을 양공주나 아줌마들이 보따리에 들고와 판다고 해서 '양키시장'이라 했다. 미군부대 물건을 몰래 내다 파는것이 위법이라 단속반이 떴다 하면 셔터문을 내리고 모두 도망을 갔는데 그 달아나는 모습이 도깨비 같다고 하여 '도깨비시장'이라고도 했단다.

6,70년대 교동시장은 보따리무역과 신고안 수입품, 미군부대 물품 등을 팔면서 수입시장으로 성장했다. 다닥다닥 붙은 상점마다 미제물건들이 쌓이고 이를 사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려 그야말로 교동시장은 돈있는 사람들의 놀이터였단다. 80년대 초 전자, 전기, 귀금속 가게 등이 생기면서 없는 게 없는 시장으로 명성을 날렸지만 80년대 후반 수입품 규제가 심해서 가게가 점점 줄어들자 먹자골목으로 변신을 했다.

그 때 국제극장(쇼전문극장) 주변엔 만두집과 돼지고기집들이 생기고 강산면옥, 남포집 등이 유명했다. 옛 대구향교가 있던 자리(2층 수입품건물)에는 130여 개의 점포가 호황을 누렸는데 지금은 대다수가 폐점하고 30여 개의 점포만 남아 있다.

교동시장은 특히 암달러상이 15명 정도 활동하고 있어서 달러골목이라고도 했다. 이제 달러아줌마는 단 한 명이 자리를 지키고 있으나 그도 90노인이 되어 문을 여는 날보다 쉬는 날이 많다고 한다. 옛날에는 일반인들이 달러를 바꿀수 없어 암달러상을 통해 환전 후 외국을 가곤 했으니 교동시장 암달러상이 왕성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암달러상들은 큰 돈도 못벌고 사기꾼들한테 당하고 감옥에도 가는 아픔을 겪기도 했단다.

1975년부터 정용학 어르신의 보금자리가 되어온 교동시장 길광당.  박영자 기자
1975년부터 정용학 어르신의 삶터가 되어온 교동시장 길광당. 박영자 기자

교동시장 일대에는 동아백화점을 중심으로 MBC, 대구백화점, 상공회의소, 원호청, 동산약국, 제일아케이드, 신한아케이드, 양장점 골목, 양복점 골목, 송죽극장, 자유극장, 대구극장, 하이마트, 음악감상실, 분홍신구두, 칠성구두, 큰비둘기한복점, 미성당 금은방, 고려당 빵집 등이 있어 대구의 모든 문화생활은 이곳에서 다 해결이 되었으니 이곳 추억이 없는 시니어가 없을 정도다. 옛 대구의 유일한 혼례식장이었던 '대구예식장' 자리에는 빌라와 원룸이 들어섰고 동아백화점도 폐점을 해서 멀지않아 사라질 것이다.

한 때는 사람들이 많아서 걸을 수 없을 만큼 활기찼다. 시청까지 늘어섰던 중고, 깡통, 전자, 전기부속 난전들이 판을 쳤으나 지금은 보석상가로 발전되어 귀금속거리가 그나마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때를 생각하며 추억 속에 하루 하루 살아가는 정 어르신. 교동에 나와서 산전수전 겪으며 8남매 맏이로서 동생들과 조카들 공부 다 시키고 결혼시켜 잘들 살고 있으니 인생 참 보람있게 살았다며 자랑한다.

그는 검정고시로 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밤늦게 공부하다 통행금지 때문에 집에도 못가고 좁은 가게에서 쪽잠을 잘 때도 많았다. 힘들었던 시간들 속에서도 잊지 못할 기쁨도 있었다. 그는 결혼 6년 만에 아들을 얻었을 때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인터뷰 중에도 손은 연신 헌 시계를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고 있었다. 요즘 손님이 있느냐는 질문에 '하루에 한 두 명 올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어'라며 가게세 내는 데는 헌 시계가 효자노릇을 한다고 했다. "이렇게 닦아서 새것처럼 만들어 놓으면 1~2만원 주고 사 가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 이 나이에 놀이터와 일자리가 있는 게 얼마나 행복하냐" 그는 아직까지 내 가게 하나 없이 세 들어 살지만 한 평도 안되는 이 가게는 1975년부터 지금까지 그의 보금자리이자 생명줄이었기에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 곳을 지키겠다고 했다.

겨우 한 사람 의자 놓고 앉으면 될 작은 공간에 전기난로 하나 피워놓고 찬 겨울을 이겨내며 계속 시계를 닦고 있는 어르신의 모습이 측은하기보다는 행복해 보이는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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