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이 숨쉬는 명승지, 구미 채미정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이 숨쉬는 명승지, 구미 채미정
  • 장희자 기자
  • 승인 2020.12.15 1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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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과 조선초 정권 교체기에 두 임금은 섬기지 않는다는 절의와 충정으로 낙향
금오산인으로 성리학에 매진, 올곧은 선비의 표상이 되어 야은 길재의 학맥을 형성
금오산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역사문화유산인 채미정이 결합되어 명승지로 지정
채미정은  금오산, 맑은 계류와 수목들이 어우러진다. 장희자 기자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匹v馬)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 회고가,   길재 )

채미정(採薇亭)은 야은(冶隱) 길재(吉再)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정자이다. 경북 구미시 금오산로 366번지에 있으며, 금오산저수지에서 금오산케이블카방향으로 0.3㎞정도 걸어가다보면 금오천 건너편 산자락에 있다.  금오산의 수려한 자연 경관과 역사문화유산인 채미정이 결합되어 이 일대가 2008년 12월 26일 대한민국 명승 제52호로 지정됐다.

채미정이 위치한 금오산(976m)은 경관이 빼어나고 힘과 기상이 넘치는 바위산으로 이루어졌다. 불교를 신라에 처음 전파한 아도화상이 이곳을 지나가다가 저녁노을속으로 황금빛 까마귀가 날아가는것을 보고 금오산(金烏山)이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오산의 채미정 입구에는 길재의 ‘회고가’ 시비가 세워져 있는데, 교과서에 실려서 누구나 한번쯤 읊어 봤을 내용이다. 길재는 1353년 해평(海平)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금오산인(金烏山人)이다. 11세에 냉산(冷山) 도리사(桃李寺)에 들어가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채미(採薇)는 고사리를 캔다는 의미로 중국 은나라의 백이·숙제의 삶이 길재의 삶과 잘 연결되는 정자의 이름이다. 장희자 기자

송도에서 당대의 석학이던 이색·정몽주·권근(權近) 등의 문하에서 주자학을 배웠다. 1374년 국자감에 들어가 생원시에 합격하고, 1383년에는 사마감시(司馬監試)에 합격했다. 1386년 진사시에 급제하여 성균박사(成均博士)에 올라 이방원(李芳遠:太宗)과 같은 마을에 살며, 성균관에서도 같이 공부하여 교분이 매우 두터웠다. 고려가 멸망하자 불사이군을 내세우면 금오산 자락에서 일생을 마쳤다.

세속의 현달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 연구에 매진했기 때문에 그를 본받고 가르침을 얻으려는 학자가 줄을 이었다.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등이 그의 학맥을 이어갔다. 1419년 생을 마친후 선산 금오서원, 인동 오산서원, 금산 성곡서원에 향사됐다.

마치 그의 삶은 중국의 백이·숙제와 닮아 있다. 백이·숙제는 은나라가 망하자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고 살다 죽었다. 그래서 길재가 죽은 지 350년 후인 1768년(영조44) 세워진 정자의 이름이 고사리를 캔다’라는 의미의 채미(採薇)’였다. 야은 길재의 삶과 잘 연결되는 정자의 이름이다.

구인재(求仁齋)는 맹자와 공자가 백이와 숙제를 칭송한 글에서 길재를 기리기 위한 정자에 이름을 붙였다. 장희자 기자

길재의 충절은 조선 시대 내내 유생은 물론이고 역대 왕들도 아주 높게 평가했다. 세종을 비롯한 역대 왕들은 길재의 후손에게 세금을 면제하고 관직에 특별 임용하는 특혜가 대대로 이어졌다. 숙종은 친히 야은 길재를 기리는 어제시를 짓기도 했다. 
금오산 아래로 돌아와 은거하니
청렴한 기풍은 엄자릉에 견주리라.
군주께서 그 미덕을 칭송함은
후인들의 절의를 장려하기 위함일세.

채미정 명승지 경내에 들어서면 울창한 솔숲속에 채미정 안내현판과 회고가 시비, 채미정 정화기념비가 반긴다. 금오산 깊은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하천위 돌다리를 건너면 채미정으로 통하는 興起門(흥기문)이 나온다. 이 문은 맹자의 진심장(盡心章)에 나오는 문구이다. 맹자가 백이의 행동을 " 백세지하문자 막불흥기야(百世之下聞者 莫不興起也, 백대 후에도 듣는 이에게 감동을 일으키노라 )"라고 한 문장에서 따온 이름이다.

흥기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경모각(敬墓閣),  좌측에 구인재(求仁齋), 우측에 채미정(採薇亭)이 보인다. 채미정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16개의 기둥이 주초위에 세워져 다른 건물과 달리 중앙에 온돌방을 놓고 사방으로 형태로 마루를 둘렀다. 방의 네 면에 들어 열개문을 달아 올리면 전체가 마루가 되는 구조이다정자에는 채미정편액과 기문과 시를 적은 현판이 걸려있다.

채미정에서 바라본 금오산 모습으로 석양이 넘어가면서 해무리를 이루고 있다. 장희자 기자

구인재(求仁齋)는 논어에 나오는 문구이다. 공자의 제자 자공이 공자에게 백이와 숙제가 어떤 사람들인가라고 물으니, 공자가 답하기를 백이와 숙제는“구인이득인우하원(求仁而得仁又何怨, 인을 추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무엇을 후회하겠느냐)” 라고 평했다고 한다. 이처럼 맹자와 공자가 백이와 숙제를 칭송한 글에서 길재를 기리기 위한 정자에 이름을 붙였다.

채미정 뒤에는 경모각이 있다. 경모각에는 숙종의 직접 쓴 오언절구와 길재의 영정이 보존되어 있다. 경모각 우측에는 숙종 30년(1694)에 선산도호부사 김만증이 세운 길재선생 유허비가 있다.

채미정에선 올곧은 선비의 정신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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