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서원, 청백리 정신이 꽃 피던 곳
이양서원, 청백리 정신이 꽃 피던 곳
  • 장희자 기자
  • 승인 2020.07.28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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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청백리의 상징인 곽안방의 정신이 살아 숨쉬는 공간
곽안방은 한훤당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달성의 대표적인 인물
성품 곧고 강직한 청백리로 선정되어 달성 역사 인물동산’에 세워짐.
각종 공직자 청렴 교육 자료로 사용되고 있는 청백리 곽안방 선생의 일화
조선시대 대표적인 청백리 곽안방을 모시는 이양서원에 청렴의 상징인 배롱나무꽃이 만개했다. 장희자

이양서원(尼陽書院)은 ‘공자를 받드는 산’ 이라는 뜻의 대니산(戴尼山) 남동쪽 언덕배기인 달성군 현풍읍 삼강3길 23번지에 있다.

이 서원은 1463년 조선 세조때 녹선된 청백리(淸白吏)이며,  현풍곽씨 대표적인 집성촌인 솔례마을의 입향조인 곽안방(郭安邦)과 곽지운, 곽규, 곽황 위패를 모시고 있다. 1995년 5월 12일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 32호로 지정됐다.

1707년(숙종 33)에 사당인 청백사를 건립하여 곽안방과 곽지운을 배향하다 1786~1871년 서원으로 발전했다.  이후 곽규, 곽황이 추향됐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강당과 외삼문, 관리사만 남고 모두 훼철된 뒤, 1945년에 사당을 복원하고, 1982년에 동ㆍ서재를 건립했다.

서원은 8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동쪽에 사당인 청백사를, 서쪽에 강당인 경렴당을 두고 동묘서학의 건물배치를 하고 있다. 보통 서원은 전학후묘(前學後廟) 형태인데, 지형적인 특성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오른쪽에 사당인 청백사가 있어 병렬형을 이루고 있다.

강당은 대원군 서원훼철령 때도 보존된 건물로, 자연석으로 기단을 쌓고 건물을 올려 자연스러운 멋이 있다. 장희자 기자

곽안방은 세조 때 전공을 세워 공신에 올랐고, 해남현감과 익산군수 등을 역임했다. 수령을 지내면서 남달리 청렴한 벼슬생활로 백성을 위해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 곽안방'으로 불렸다.

곽안방은 세종 치세 말기에 무과에 급제한 후 벼슬에 나가 승진을 거듭해 해남현감을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어 청렴한 관리로 명성이 높았다.

 세조 때 군공이 인정돼 원종이등훈에 녹훈되었으며, 그 후 익산군수를 마지막으로 고향 솔례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

군현에 나아가 정사를 펼 때는 엄하고 분명하며, 어질고 용서를 베풀어, 아전은 두려워하고 백성은 노래하며 숭상했다.

청백리 곽안방을 모시는 사당이라 하여 '청백사'라 하며, 지형적인 조건을 고려하여 강당 우측에 대지를 한단 높여서 배치했다. 장희자 기자

평생 얼음과 옥 같은 처신을 했으며, 임기를 마치고 아무런 재물이나 재산을 소유하지 않은 채 그저 말 한 필에 의지해 돌아오자 고향 백성들이 태수의 행차인 줄 몰랐다고 전해진다.

곽안방이 익산에서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한 노비가 열쇠 하나를 차고 오는 것을 보고 놀라며 말했다. "이것 또한 관공서의 물건이니 어찌 작고 큰 것을 논하겠는가. 나를 더럽힐 수 없다" 며 바로 돌려보내도록 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주위에서 '현어(懸魚)'를 실천한 것과 같다'고 했다. '현어'는 관공서에서 선물받은 고기를 창고에 달아 놓고 떠날 때 가져가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관리의 청렴도를 나타낸다.

 

서원 동편으로 대구테크노폴리스지구 넘어로 비슬산 줄기가 연봉을 이루고 있다. 장희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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