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동북공정 역사왜곡에 맞서다, 태재욱 촌장
중국 동북공정 역사왜곡에 맞서다, 태재욱 촌장
  • 장희자 기자
  • 승인 2020.07.3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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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발해의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허점을 지적하는 자료 수집ㆍ 홍보 위해 2000년초부터 활동하고 있는 태재욱 발해왕조제례 보존회장. 장희자 기자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서는 지금까지 대조영에 관한 많은 견해가 표명되어 왔지만, 일반적으로 구당서에 나온 '고려 별종'(渤海靺鞨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으로 나온 것으로 보아 고구려 장군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이러한 역사학계의 정설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동북공정이란 미명 하에 2001년부터 중국의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연구를 진행해왔다. 고조선, 고구려, 발해 등이 고대 중국의 동북 지방에 속한 지방 정권이라는 역사왜곡을 지금도 계속 진행하고 있다. 중국이 발해의 역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려는 작태에 대해 온 가문이 똘똘 뭉쳐 역사 바로세우기를 하고 있는 경북 경산시 남천면 발해마을을 찾아 태재욱(79) 발해왕조제례 보존회장을 만났다.

-농번기라 바쁘신데도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님 출생 및 성장과정에 대하여 간략히 소개해 주십시오. 

저는 영순태씨 43세손으로 1942년 경산시 남천면 송백2리 721번지 고향마을에서 2남 4녀 중 5번째로 태어났습니다. 남천초등 11회 및 영남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에서 총포사업을 하다가 1970년 초부터 정부에서 8년 정도 수렵을 금지시키자 총포사업이 잘 되지 않아서 1990년초에 귀향하여 문중재실을 관리하던 중, 대조영을 모시는 사당과 영순태씨 입향조에 대한 내력 등을 소상히 알게 되었습니다  2001년부터 중국이 동북공정을 진행하면서 우라나라 역사인 발해에 대하여 중국사로 편입시키려는 역사왜곡이 시작되었습니다.

중국이 우리나라 역사의 근간을 흔들고 있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대조영의 후손으로서 도리가 아니라는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2000년 초부터 중국의 역사왜곡을 반박하기 위하여 먼저 문중의 중지를 모아서, 발해 대조영 후손들이 사는 마을을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곳으로 복원하기로 했습니다. 역사 자료를 수집 홍보하면서, 장기적 발해마을 종합계발계획을 추진하기로 마음먹고 ‘발해왕조제례보존회’ 를 결성하여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지금까지 차근 차근 프로젝트를 진행해 오고 있습니다.

태재욱 촌장이 조선시대 식량사정이 좋지 않아서 어려움에 처해 있는 백성들에게 4대째 2천 석 구휼미를 나누어 주었다는 내용의 완문(完文)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장희자 기자

- 마을 입구에 ‘발해마을’ 이라는 표지석이 있는데 마을이름과 내력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한마디로 대조영의 후손인 영순태씨 집안이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 마을이라서 ‘발해마을’ 이라고 부릅니다. 발해는 거란의 침공으로 9세기 후반 멸망했고, 발해 왕조의 마지막 세자 대광현은 934년 민중 수만 명과 함께 고려로 내려와 살았습니다. 이후 대조영의 아버지 대중상의 18세손인 중시조 태금취는 고려 고종 때 몽골군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워 대장군에 오르면서 영순현(지금 문경 일대) 고을을 하사받아 다스렸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고 대중상의 31세손 태순금은 선조께서 피난하면서 경산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발해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태극기와 발해기가 도로 양편에서 나부끼고 있다. 장희자 기자

- 국내에 대조영 후손들이 모두 합쳐 얼마나 뿌리내리고 있습니까.

▶북한쪽에 많이 정착했고, 국내에는 발해마을이 유일의 태씨 집성촌입니다. 1950년 중반에는 송백리에만 60여 가구가 살 만큼 번성했으나 이농현상으로 지금은 27가구에 40여 명 정도가 살고, 주민 중 80%가량이 태씨 집안 사람입니다. 국내에는 2015년 기준으로 9천63명입니다.

발해마을에는 대조영이 만주벌판에서 누비는 벽화가 3곳에 그려져 있다. 장희자 기자

- 그런데 대조영은 성이 대(大)자인데 태(太)자와 다르지 않습니까?

영순태씨가 어째서 대(大)씨인 대조영의 후손일 수 있느냐는 의문을 가질수 있지만 영순태씨의 태(太)는 큰 대(大)와 서로 통용되는 글자입니다. 크다의 의미인 대(大)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 획을 하나 추가해 태(太)로 썼을 뿐입니다. 중국의 역사 기록서인 '동사통감'에도 대조영을 태조영이라고 쓴 기록이 있고, 고려시대 역사서 '고려사'도 고려 후기의 무신 대집성(大集成)을 태집성(太集成)과 혼용했습니다.

대조영이 말을 탄 모습을 그린 벽화는 사실적이면서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장희자 기자

- 마을 담장 3곳에 대조영이 말을 타고 누비는 벽화는 언제 그렸습니까?

발해마을은 2016년 농촌건강장수마을에 선정되고, 2017년 농촌진흥청 주관 ‘전국 어르신마을가꾸기 경진대회’ 에 참가하면서 대조영 후손들이 살고 있는 태씨 집성촌이라는 역사 콘텐츠를 발굴, 적극 활용해 그해 9월에 발해마을 대형 마을표지석, 신도비, 발해고황 대조영장군상 제막식을 진행하고 마을벽화, 기마상 조형물, 안내석, 발해 상징 로고 깃발과 태극기, 마을스토리 지도 등으로 마을환경을 정비, 경산을 대표하는 농촌관광마을을 조성하였습니다. 2017년 11월 28일 ‘전국 어르신마을가꾸기 경진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했습니다.

만주 벌판을 누비는 대조영과 기마부대의 함성이 귓전에 울리는 듯하다. 장희자 기자

- 그 밖에 발해를 상징하는 다른 조형물은 없습니까.?

▶ 2018년 3월 21일 오전 11시 발해왕조 춘분대제를 지낸 후에 '발해국 태씨의 뿌리 및 민족사'란 대형 유래석을 세움으로 발해 마을을 찾는 탐방객들에게 발해국의 역사와 명성을 이해하는 데 길라잡이가 되게 하였습니다.

대조영 영정을 모시는 추모제앞 정원에는 발해마을 안내판, 유래석, 대조영 흉상, 석등 등이 조성되어 있다. 장희자 기자

- 대조영 영정은 어떻게 제작하였습니까?

제사에 내걸리는 표준영정은 '‘얼굴박사’ 라고 불리는 조용진 한국얼굴연구소 소장이 전국의 142명의 태씨 남성 얼굴 사진을 찍어 특징을 종합 분석한 뒤 민두상을 만들고, 그것을 기초로 하여 권희연 숙명여대 교수가 영정을 그렸습니다. 용모를 만드는 유전자는 그 수가 적기 때문에 후손들에게 잘 물려진다 하며, 이 작업엔 석 달 정도가 걸렸습니다. 태씨 가문 남성은 평균 한국인 남성보다 머리의 앞과 뒤가 더 큰 특징이 있었습니다. 대조영 표준영정은 현재 정부 표준영정 제86호로 지정되어 하나는 서울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추모제 뒷편 사당에 모셔진 대조영 영정은 정부표준영정 제86호로 지정되어 2개 중 다른 1개는 서울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장희자 기자

- 태씨 종친회 차원에서는 현재 어떤 행사를 진행하고 있습니까?

▶ 5.16 이후 한번 제사를 지냈으나 2015년부터는 춘분과 추분에 대조영을 추모하는 제사도 지내기 시작했으며, 제사를 지내는 날엔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영순태씨 후손들이 모두 모입니다. 처음 대조영 후손들이 고려에 내려왔을 때만 해도 왕조 제사를 지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중시조 제사로 작아졌다가, 2015년 영순태씨와 협계태씨를 합치면서 다시 왕조 제사로 부활하여 지내고 있습니다.

2015년 12월 7일 태씨종친회가 대조영함을 방문하여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장희자 기자

- ‘발해왕조제례 보존회’에서  향후 추진 방향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2013년 5월 27일 중국 지린성(吉林省) 발해왕궁이 있던 자리에서 흙을 한되 퍼 와서 소중히 보관하고 있으며, 대조영 황제의 왕릉을 재현해 능 안에 중국 발해왕궁터에서 갖고 온 흙을 넣어 둘 생각입니다. 발해역사관과 대조영공원을 조성할 계획이고, 대조영 영정을 모신 고황전 뒤쪽에 대나무 산책길을 만들어, 역사교육 관광지로 가꾸어 가는 '발해마을종합계발계획'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것입니다.

2010년 10월 14일 영순태씨 문중 유교책판 등 국학자료를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하여 받은 감사패.

발해깃발을 로고로 넣은 태씨 종친회 깃발. 장희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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