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과 함께 당시 영남유학의 쌍벽을 이루었던 대학자
평생 선비의 삶을 올곧게 지키며 국정쇄신, 백성안위 걱정
학문과 삶이 일치되는 것을 강조하는 실천적 성리학 중시
덕천서원(德川書院)은 지리산 천왕봉 동남쪽 자락인 경남 산청군 시천면 남명로 137번지에 있다. 지리산 천왕샘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두 갈래로 나뉘어 중산리와 삼장으로 흐르다가 합류하는 지점에 덕산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이 서원은 조선중기 대표적인 산림처사(山林處士)였던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576년 문인들에 의해 덕산서원(德山書院)으로 세워졌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2년에 다시 중건되었고, 1608년 선생이 영의정에 추증되고 사액되어 크게 확장됐다.
옥산, 도산서원과 더불어 삼산서원(三山書院)의 하나로 정족(鼎族)을 이루면서 덕천서원(德川書院)으로 개칭되어 이른바 강우(江右) 48가(家)의 본산으로 강우유림을 영도하여 온 유서 깊은 서원이다.
정조 때의 명상 채제공이 원장을 지내는 등 성황을 이루었으나, 대원군 때(1865) 철폐되는 비운을 겪었다. 지금 건물은 1926년 복원한 것으로 근래 선생의 선비정신과 교육사상이 새로 평가되고 있다. 경남 유형문화재 제89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식 선생은 1501년 경남 합천군 삼가면 토동 외가에서 태어났다. 30세 때부터 처가가 있는 김해의 신어산 아래 신해정을 짓고 학문에 정진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48세에는 다시 고향인 삼가로 돌아와 뇌룡정과 계부당을 짓고 제자를 길렀다.
이 시기에 선생의 명성은 이미 사림의 영수(領袖)로 온 나라에 떨쳐 여러 번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거절했다. 61세에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 산천재를 지어 후진 양성에 힘썼다.
선생의 교육철학은 개성과 자질에 따라 가르치며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섭렵(涉獵)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을 중시했다.
성리학의 이론적인 측면만을 궁구함에 따른 폐단을 알고 실천을 더욱 중시하여, 제자들에게 학문의 다양성을 강조하여 천문ㆍ지리ㆍ의학ㆍ궁마ㆍ진법 등의 학문도 가르쳤다.
67세 되던 해 왕위에 오른 선조 임금이 여러 번 벼슬을 내렸으나 나가지 않았고, 68세에 마지막으로 무진봉사(戊辰封事)를 올려 당시의 정치 폐단과 이를 개혁할 대안을 제시했다. 일생 동안 선비의 삶을 올곧게 지키며 국정쇄신과 백성안위를 걱정하다 1572년(72세) 산천재에서 운명했다.
경내의 건물로는 숭덕사(崇德祠)·경의당(敬義堂)·동재(東齋)·서재(西齋)·신문(神門)·대문(大門)·세심정(洗心亭)·산천재(山天齋)·상실(橡室)·장판각(藏板閣)·별묘(別廟)·문루(門樓)·재실(齋室)·고사(庫舍) 등이 있고, 신도비(神道碑)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