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와 임고서원
정몽주와 임고서원
  • 이상유 기자
  • 승인 2020.11.0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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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고서원 전경. 이상유 기자
임고서원 전경. 이상유 기자

 

중국의 사가 사마천은 “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 이는 죽음을 사용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고 했다.

우리 역사에서 참으로 태산처럼 무거운 죽음을 선택한 사람이 있다면 고려 말의 충신 포은 정몽주 선생이 아닐까?

선생은 이씨조선의 개국에 동참해 달라는 이성계 일파의 요청에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라며 시조 단심가(丹心歌)로 답하고 선죽교 다리 위에서 깨끗하고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했다.

한곳을 향한 지극히 높고 순수한 일편단심 충절의 정신, 선생의 죽음은 영원히 살아남아 지금도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숙질 줄 모르는 ‘코로나 19’와 편 가르기 식 정국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힘든 고비를 넘기고 있는 시기다.

지친 일상을 털어내고 바닥난 정신의 배터리를 충전시켜보겠다는 생각으로 포은 정몽주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영천의 임고서원을 찾았다.

승용차로 대구에서 포항 쪽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가다 영천 금호에서 시내 외곽도로인 호국로에 진입해 10분 정도 달리면 임고 교차로가 나온다. 그곳에서 내려 자양 방면으로 1km 남짓 올라가면 양항 교차로가 있고 좌회전을 하면 바로 임고 서원이다.

임고 서원은 울타리나 담장이 없이 도로변에 잇대어 개방되어 있어 넓은 서원 부지 안에 조성된 갖가지 기념물들을 누구나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

서원 입구에 들어서자 높이가 8m나 되는 큰 비석에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租),라고 새겨진 송탑비가 우뚝 서 있었다. 퇴계 이황 선생의 유묵(遺墨) 중에서 찾아내 새겼다고 하는 이 글씨는 선생이 성리학의 시조라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뒷면에는 숙종, 영조, 고종 임금이 선생을 칭송하여 손수 지었다는 시의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선생이 비록 조선 개국에는 반대했지만, 드높은 학문과 정신은 조선 시대 선비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숭앙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몽주 선생 송탑비. 이상유 기자
정몽주 선생 송탑비. 이상유 기자

송탑비를 지나 임고서원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조옹대(釣翁臺)라는 정자로 올라갔다. 조옹대는 선생이 낚시를 즐기던 곳이라고 한다.

지난여름, 짧은 생을 아쉬워하며 울어대던 매미들의 합창이 나뭇가지마다 걸려 있는 듯하다.

임고서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산자락의 왼편에는 옛 서원이 있고 그 옆으로 새로 지은 서원 건물이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임고서원은 임금이 직접 현판과 서적, 노비, 토지 등을 하사한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명종 9년(1554)에 처음 세워졌으나 그 후 임진왜란과 서원철폐령 등으로 수난을 겪다가 1980년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한다. 어려움 속에서도 서원을 지키기 위해 애를 써온 후손들의 정성이 존경스럽다.

조옹대에서 내려와 서원 앞마당으로 다가가자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선생의 시조 ‘단심가’와 그의 모친이 지은 ‘가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로 시작되는 ‘백로가’라는 시조가 비석에 함께 새겨져 있었다. 과연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원 안으로 들어서서 영광루(永光樓)라는 누각을 지나자 서원 본체와 뒤편에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었다.

어디선가 ‘일편단심, 흔들림 없이 살아라’ 고 하는 선생의 말씀이 들려오는 듯했다.

서원 앞마당에는 수령이 500년이나 된 큰 은행나무 한그루가 버티고 서 있었다. 키가 20m, 가슴둘레가 5.95m나 되는 이 은행나무는 임고서원을 지키는 든든한 호위무사처럼 보였다. 천년을 산다는 나무의 화석이다. 오랫동안 임고서원과 선생의 정신을 지켜주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마침, 유물관의 관람 시간이 되어 안으로 들어갔다. 유물관에는 선생과 관련된 여러 종류의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고 동영상 등이 제작되어 관람객들의 관심과 흥미를 끌고 있었다.

유물관에 전시된 자료들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선생의 효행과 충절, 높은 경지의 학문과 작품 등 그동안 모르고 지냈던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역시 일신의 영달을 버린 한순간의 결단도 일생의 삶에 응축된 신념의 결과였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유물관 뒤쪽에는 포은 연수관과 충효문화수련원, 단체 숙소 등이 잘 지어져 있었다. 이곳에서는 학생, 일반인, 직장인을 상대로 다양한 인성.체험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근래 영천시에서는 임고서원을 명실상부한 충효 사상의 성지로 만들기 위해 많은 예산을 들여 임고서원 성역화 사업을 완료했다고 한다.

앞으로 임고서원이 국내는 물론 세계인들이 찾아와 우리의 전통문화와 충효 사상을 배우고 체험하는 공간으로 우뚝 서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내가 선택한 임고서원의 마지막 관람 코스는 선죽교다. 선생이 기꺼이 죽음을 선택한 장소는 어떤 모습인지 천천히 살펴보고 싶었다.

북한의 개성에 있는 선죽교를 실측하여 똑같은 크기와 모양으로 만들었다는 선죽교는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았다. 비석에 새겨진 글씨도 조선의 명필 한석봉이 쓴 것을 탁본해서 그대로 새겨 넣었다고 한다.

선죽교 돌다리 위로 올라가 죽음의 순간을 맞이한 선생의 심정이 되어본다. 세상에 죽음을 두렵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선생은 사는 것 보다 더 소중한 죽음도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선생은 죽음을 택함으로써 우리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남았다. 선생의 정신은 사육신(死六臣)에게, 항일 의병과 독립투사에게, 민주주의 전사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임고서원 탐방을 마치고 돌아 나오면서 나의 삶과 다가올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티끌 같은 욕망에 사로잡혀 흔들리며 살아온 날들이 선생께 부끄럽고 죄송하다. 사마천이 말하는 새털보다 가벼운 죽음이 되지 않도록 지금부터라도 일편단심, 남은 삶에 정성을 다해야겠다.

인자한 모습의 선생이 다가와 내 어깨를 다독여 준다.

임고서원 선죽교. 이상유 기자
임고서원 선죽교. 이상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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