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환 한국영상박물관 관장 "비디오는 내 운명"
김태환 한국영상박물관 관장 "비디오는 내 운명"
  • 정은택 기자
  • 승인 2020.07.27 1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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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에 흔해빠진 돌멩이도 주워 3년을 두면 3번은 쓰여질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나의 인생을 바꾼 것이다
Rolleiflex(롤라이)1호이안반사식 카메라 김태환 한국영상박물관장이 1년간 벌어서 1958년에 최초구입해 사용한 카메라
김태환 한국영상박물관장이 1958년 1년간 벌어 모은 돈으로 처음 구입해 사용한 카메라​ 롤라이플렉스(Rolleiflex) 1호 이안반사식 카메라를 보여주고 있다. 정은택 기자

한국사진작가협회 자문위원인 김태환(82) 관장은 자신의 한 평생을 사진, 영상에 바친 ‘쟁이’이다.

현역에서 은퇴한 지금은 대구 중심가에 자신이 ‘미친’ 인생이 담긴 한국영상박물관(대구시 중구 중앙대로 456-8)을 운영하고 있다. 그의 박물관에 들어서면 빼곡하게 진열된 비디오카메라들에 먼저 놀라게 된다. 이곳에서 김 관장은 카메라와 비디오카메라 등 각종 영상장비들을 관리하고 있다. 요즈음은 코로나 때문에 잠시 문을 닫고 있지만 언제든지 관람할 수 있다고 한다.

화약으로 사용하던 스트로보(조명)
화약으로 사용하던 스트로보.(조명기)  정은택 기자

◆열네 살에 시작된 사진과 인연

김 관장의 어린 시절은 그리 유복하지 않았다. 초등학교(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학교를 중퇴하고 경북 영천의 한 사진관에 무작정 찾아가 일자리를 구했다. 사진관 일을 하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명절이 다가왔다. 그 시절엔 명절이면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게 가족사진 찍기, 극장 구경, 서커스 구경이었다.

그날도 사장님은 가족들과 극장 구경을 갔다. 사장님은 “금방 다녀올 테니 손님 오면 절대 보내지 마라”는 당부를 하고 사진관을 나섰다. 얼마쯤 지났을까. 아니나 다를까 손님이 왔다. 사장님의 당부도 있었기에 소년 태환은 조명기에다 화약까지 넣어(예전 조명기는 화약을 태워 사용했다) 놓고 기다렸다. 하지만 사장님은 오지 않았다. 손님은 자꾸 가려 하고…. 이왕 가실 바에야 내가 직접 찍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네 살이니 직접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키가 작으니 의자에 올라서 화약이 든 조명기를 한 손으로 높이 들고 셔터를 눌렀다. 하지만 손을 너무 들었다. 조명기 화약이 터지면서 천장에 있는 만국기에 불이 붙어버렸다. 그 당시에는 만국기를 습자지에 직접 그려 붙여 가게를 장식했다. 후루룩~ 하며 습자지 만국기가 다 타버렸다. 어린 마음에 겁이 나서 사장님 오시기 전 사진관에 남은 잔돈을 들고 대구로 도망쳤다. 사진과의 첫 만남은 그렇게 끝이 나고 말았다.

◆사진에서 영상으로 방향 전환

대구에서 복싱 심판 일을 했다. 심판 일을 하며 섬세한 부분은 영화로 찍어서 자세히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1965년부터 영화 촬영을 시작하였다.  그러다 비디오카메라 라는 것이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 1980년대 초반이었다. 김 관장에겐 눈이 번쩍 뜨이는 일거리였다. 움직이지 않는 사진만 찍어오던 시대에서 ‘움직이는 사진’으로 전환되는 시기였다. 당장 비디오 카메라를 사서 영상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평소 사진에 대한 지식이 있었기에 영상 공부가 어렵지만은 않았다. 영화 촬영에 자신감이 붙자, 김 관장은 본격적으로 교동시장에서 비디오전자상사 영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1983년대 초까지 우리나라에서 결혼식 비디오를 촬영하면 불법으로 벌금형이었죠. 비디오 촬영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던 때였으니 당연했죠.”

김 관장은 비디오 촬영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게 급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비디오작가협회였다. “대구에 본부를 두고 전국에 32개 지구를 만들었습니다. 국제비디오촬영대회를 9회, 국제비디오공모전 14회, 국제공모전대회를 35회 개최했습니다. 3천~6천 명 회원들의 회비를 모으고 정부에서 일부 지원을 받고 나머지는 자비를 들여 진행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비디오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점차 달라졌습니다. 이후 촬영하는 것은 자유롭게 하되 여러 사람에게 보여줄 때는 프로덕션에 심사를 받도록 해야 한다는 쪽으로 법령이 정비되었습니다. 저를 포함한 회원들의 이런 활발한 활동이 있었기에 현재 비디오 촬영할 수 있게 된 게 아니겠어요? 허허.”

빽빽하게 쌓인 촬영기기들을 보며 감탄을 금할수가 없었다
한국영상박물관에 빽빽하게 쌓인 영상장비들을 보며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정은택 기자

◆비디오카메라는 내 인생

사진과 영상에 빠져 살았던 김 관장이었지만 그가 살아오면서 그런 일만 해온 것은 아니었다. 복싱도 하고 복싱 심사, 식당, 의류업, 건축업, 비디오전자상가, 웨딩촬영까지 많은 일을 했다. 그중 식당을 했을 때가 가장 여유로웠다. 그 시기에 번 돈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여러 가지 일을 하며 많은 돈도 벌고 잃기도 하는 삶 속에서도 그의 비디오카메라 사랑은 계속되었다. 촬영도 촬영이지만 비디오카메라 수집에 더 재미가 있었다. 지금까지 김 관장이 수집한 영상기기는 총 2천500여 점이나 된다. 카메라가 600여 점, 영화기 150여 점, 비디오카메라 1천750여 점이다. 전시장에도 보관하고 있지만, 집에도 많이 있다.

김 관장이 그중에서도 가장 아끼는 카메라는 1958년 롤라이플렉스(Rolleiflex) 1호 이안반사식 카메라이다. 그때만 해도 카메라를 빌려서 촬영하는 시기였다. 김 관장은 이 카메라를 처음으로 자신의 카메라로 가지게 되었다. 금액은 기억 잘 안 나지만 1년 모은 돈으로 구입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김 관장은 요즘 자신의 소장품 중 하나를 문화재로 지정받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1976년산 세계 1호 거치용 비디오이다. “100대만 한정 생산된 제품입니다. 제조사에서 이 제품을 거둬들이면서 새것으로 바꿔준다고 했지만 바꾸지 않았어요. 전 오히려 새것과 바꾸지 않고 하나 더 사서 보관을 하였습니다. 전자제품 중에서 문화재로 지정된 게 그리 많지 않습니다. 1959년 금성사에서 나온 국내 최초 라디오와 냉장고(1965년산), 텔레비전(1966년산) 정도이지요. 이젠 비디오 중에서도 문화재가 나왔으면 합니다.”

그 다음으로 그가 심혈을 기울이는 것은 제대로 된 박물관이다. 한국영상박물관은 1999년 9월 15일 개관, 김 관장이 20년째 운영하고 있다. “사진, 영화, 비디오를 영상이라고 합니다. 사진, 영화와 관련된 박물관은 많습니다. 하지만 비디오 박물관은 없어요. 모든 이가 귀하다는 것은 다 압니다. 탐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에 맞지 않아요.”

김 관장은 현재의 ‘한국영상박물관’이란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기증자 위주로 전시하는 조건이면 기증할 생각도 있다고 한다. “나의 인생이고 자부심이고 자존심이고 자랑거리인데 그것이 없어지고 다른 이름으로 기증을 하라고 하니 할 수 없는 부분이죠.”

정 안되면 재단법인을 만들어 자신이 죽고 나서라도 운영할 수 있도록 할 생각이다. 김 관장은 자신이 모은 영상장비들은 가족들에게서도 지키고 싶은 것이라 한다. 다섯 자녀를 키우며 자립심을 길러주었다며 7년 전에 포기각서까지 받았다고 한다. 법적효력은 없다 하지만 자식들이 마음이라도 그리 가지라는 뜻으로 받아놨다고 한다.

“내 나이 80살이 넘었는데도 누군가 나를 찾아와 주고 함께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다”며 환하게 웃는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다. 김 관장의 순수하고 하나밖에 모르는 영상장비 인생이 우리들에게 좋은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