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5월 12일 대구광역시문화재자료 제29호로 지정된 소중한 선조의 문화유산
삼강(三綱)의 도덕과 가치를 쫓아 생명을 버린 옛 조상들의 뜨거운 숨결이 느껴지는곳.
한민족이 숱한 외침에도 5000년을 버텨 온 원동력이며 진정한 버팀목
현풍 곽씨(郭氏) 십이정려각(十二旌閭閣)은 대구 달성군 현풍읍 지동길 3번지에 있다. 현풍 곽씨(郭氏)시조 곽경(郭鏡)은 1138년(고려 인종 16년) 과거에 급제하여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냈다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올랐으며, 포산군(苞山君)에 봉해졌다. 이후 곽경의 후손들이 본관을 포산(苞山)으로 세거(世居)하였다. 조선조에 이르러 포산현(苞山縣)이 현풍(玄風)으로 개칭(改稱)됨에 따라 현풍(玄風)을 본관(本貫)으로 하게 되었다.
시조의 13대 후손인 청백리 곽안방(郭安邦)은 아들 곽승화와 함께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이다. 그는 세종 치세 말기에 무과에 급제한 후 출사, 승진을 거듭해 세조 때 해남현감, 익산군수로 발령받아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에 오르게 된다.
그는 익산군수를 마지막으로 대구시 달성군 현풍면 대리에 터를 잡고 살면서 예절바른 사람이 되라고 솔례(率禮)마을이라 이름하였다. 공은 또한 충효세업(忠孝世業) 청백가성(淸白家聲) 가훈을 남겼다. “충과 효를 가업으로 삼아 실천하고 청렴과 결백을 가문의 명성으로 삼으라”는 뜻이다.
현풍곽씨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명문가문이다. 명문을 상징하는 건축물이 있으니 전국의 어느 문중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1995년 5월 12일 대구시 문화재자료 제 29호로 지정된 “ 현풍곽씨십이정려각” 이다. 정려(旌閭)는 조선시대 충신이나 효자, 열녀를 표창하기 위해 내린 것인데 이 현풍 곽씨 집안에는 정려가 무려 12개나 된다.
1598년(선조 31)부터 영조 대에 이르기까지 현풍 곽문이 배출한 충신 1, 효자 8, 효열부 6 등15분을 기리고 있다. 처음에는 정려를 받을 때마다 하나씩 세우다가 영조 대에 이르러서 한데 모아서 세웠다.
정려각 입구에는 삼강문(三綱門) 현판이 걸려 있다. 삼강은 군위신강(君爲臣綱)·부위자강(父爲子綱)·부위부강(夫爲婦綱)이다. 임금은 신하의 근본, 어버이는 자식의 근본, 남편은 아내의 근본이라는 뜻이다. 삼강의 핵심은 충(忠)·효(孝)·열(烈)) 오륜과 함께 조선을 지배한 기본 이념이다.
삼강문을 지나면 본건물이 있다 건물은 앞면 12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꾸몄다. 내부에는 2기의 비석과 12개의 현판이 있다, 6.25전쟁으로 건물 일부와 비석 1구가 완전히 파괴됐다, 1963년 모두 중수했다, 건물과 현판은 최근 것이다.
정려를 살펴보면 이 현풍 곽씨 집안이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보여준 불굴 정신의 전형임을 알수 있다. 충신 증 이조판서 안음현감 충렬공 곽준/ 효자 증 호조정랑 곽이상, 곽이후 형제 / 열부 증 정랑(正郞) 곽이상 처 거창신씨 / 열부 학생 유문호 처 현풍곽씨 / 효자 유학(幼學) 곽결, 곽청, 곽형, 곽호 4형제 / 효자 증 별검(別檢) 곽이창, 곽유창 형제 / 절부 계공랑(啓功郞) 곽재기 처 광릉이씨 / 열부 학생 곽홍원 처 밀양박씨 / 열부 학생 곽수형 처 안동권씨 / 열부 학생 곽내용 처 전의이씨/ 효자 증 곽의창/ 효자 증 곽경성 순서로 되어 있다.
곽안방의 현손인 충렬공 곽준은 정유재란(1597년) 때 안음(경남 함양군 안의면)현감으로, 왜적 주력부대와 맞섰다 황석산성을 수호하다 중과부적으로 화를 당하게 된다. 당시 그의 큰 아들인 이상(履常)과 둘째 아들 이후(履厚)가 보호하려 하자 “나는 직책이 있으니 사수를 해야 하지만 너희들은 피란하라”고 했다 두 아들은 “아버님이 구국을 위하시는데 자식이 부친을 위해 죽는 것이 불가하리오”하면서 호위하다 함께 참해(斬害)를 당했다.
이상의 부인 거창신씨는 남편을 따라 성안에서 자결했다, 곽준의 딸로 류문호의 부인인 포산(현풍)곽씨는 친정의 변고를 듣고 싸움터로 나갔다가 그의 남편이 전사하자 바로 목을 매 자결했다. 이런 오중(五重)의 순사(殉死)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선조는 일문삼강(一門三綱)이라 하며 정문을 지어 표창할 것을 명했다.
이와 함께 곽재훈(망우당 곽재우 사촌)은 임진왜란(1592) 때 병든 몸으로 네 아들과 함께 달성 비슬산 중턱 산성굴에 숨어 있었다 왜적이 발각하고 침입해 그를 살해하려 하자 네 아들이 차례로 호위하다 왜적의 칼에 목이 잘렸다. 마지막에 그만 살아남으니 왜적도 그 효성에 감동해 석방하면서 그의 등에 ‘사효자지부(四孝子之父)’라는 글자를 쓴 패를 달아주어 죽이지 못하게 했다. 그 후 굴은 사효자굴로 불리게 되었고, 조정에서는 정문을 지어 표창했다.
솔례마을 입구에 있는 십이정려각앞에는 “충효세업 청백가성”(忠孝世業 淸白家聲)이라는 문훈이 새겨 져 있는 커다란 석비(石碑)가 서 있다. 이 문훈비(門訓碑)은 本山 곽종량(郭鍾凉)의 정성어린 헌금으로 1999년에 건립하였다.
길 좌측 맞은편에는 곽병원을 창립한 운경 곽예순(1919∼20020)박사의 행적비도 눈에 띄는데 주변에 세그루의 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를 곽예순나무라고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