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인지 몰라도 이른 아침부터 사장 부부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요즘 중국 관광객이 많이 온다더니 단체 손님이 오나?’ 괜한 걱정까지 하며 숙소 앞 해변으로 나간다. 잠에서 덜 깬 미리사의 해변을 걷고 있는 연인의 모습이 영화의 장면처럼 다가온다. 식당 주변을 쓸고 있는 종업원도 야자수 아래 외로이 앉아 있는 아이도 모두 해변 마을의 풍경이다. 십여 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였던 쓰나미(Tsunami)의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지만, 그때의 악몽은 남아 있는 듯하다. 이렇게 조용하고 아름다운 바다가 악마로 변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인도양아! 네가 화를 내면 큰 눈망울에서 떨어지는 눈물을 어찌 다 담을래. 다시는 화내지 말아다오!'
바닷가 동네를 돌아다니다 숙소로 들어서자 사장 부인인 란디야(Randiya)가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하며 아침 식사를 차려놓았으니 레스토랑으로 오라고 재촉까지 한다. 며칠간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그녀를 마주하기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환대를 받았다. 한국말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지내기에 편한데 숙박비를 반값으로 깎아주는 것도 모자라 공짜 음식에 여행 가이드까지 리조트에서 받을 수 있는 서비스는 모두 받은 것 같아 고마울 뿐이다.
식당에 들어서자 식탁 위에 차려진 성찬에 입을 다물 수가 없다. 열대 과일과 현지 음식으로 한 상 멋들어지게 차려져 있다. 뒤따라온 서양인 부부도 놀라는 눈치다. 오늘 우리가 떠난다는 걸 알고선 란디야가 신경을 써서 아침을 준비하였다고 한다. 식사를 마치자 란디야는 주방까지 보여주며 한국에서 배운 대로 자신의 호텔과 버스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다며 한국 생활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한다. 정신없이 일할 때가 제일 즐겁다고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행복한 표정이 역력하다. 농담 삼아 “한국 사람처럼 일 중독에는 빠지지 말라!”고 하자 그녀는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나라에서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어찌 좋은 기억만 있을까마는 이들 부부처럼 나쁜 기억들은 잊어버리고 꿈꾸던 삶과 함께 한국에 대한 좋은 감정만 가지고 살아갔으면 하는 마음이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곤 콜롬보(Colombo)로 가기 위해 웰리가마(Weligama) 역으로 향한다. 오전 9시 55분 열차다. 역사 안은 기차를 기다리며 잡담을 나누는 무슬림이 이국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턱수염의 무슬림만 보면 괜히 겁부터 나는지 모르겠다. 빤히 쳐다보았다가는 당장이라도 달려와 눈을 가리고 무릎을 꿇게 할까 싶어 엉뚱한 곳만 쳐다본다. 선입견이 무섭긴 무섭다. 우리만 이상한 것이 아닌가 보다 그들도 우리가 이상한지 힐끗힐끗 쳐다보며 눈이라도 마주치면 고개를 돌려 버린다.
기차가 정겨운 소리를 내며 플랫폼으로 들어온다. 콜롬보까지 3시간 남짓 걸린다고 하니 잠시 잠이라도 잘 생각에 기차에 오른다. 잠시 후 기차는 덜컹거리며 웰리가마 역을 출발한다. 옆자리의 소녀는 바깥세상이 무엇이 그렇게도 신기한지 눈을 떼질 못한다. 서울로 가는 기차 차창 너머로 지나가는 딴 세상에 놀라워했던 까까머리 어린 시절과 너무나 닮았다. 얼마 가지 않아 잠 속으로 빠져든 소녀의 모습에서 ‘순수’라는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웅성거림과 짐을 챙기느라 기차 안이 분주하다. 높은 건물과 고급 승용차가 하나둘 보이며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임을 알려준다. 콜롬보역 짐 보관소에 배낭을 맡겨놓고 시내로 나선다. 언제부턴가 해외여행을 갔다 오면 주변 사람에게 열쇠고리라도 나눠주던 풍속은 사라지고 선물을 사는 것이 오히려 어색한 요즘이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리랑카의 ‘실론티(Ceylon Tea)’를 선물용으로 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물어물어 찾아간 곳이 실론티 전문매장인 ‘Tea Board’이다. 상점으로 들어서자 네댓 명의 여직원이 인사도 없이 빤히 쳐다만 본다. ‘실론티’에 일가견이 있는 친구는 이것저것 만져보고선 마음에 든 제품을 넉넉히 주문하자 여직원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요구하는 만큼 물량이 없다고 한다. 한두 개 정도 사는 사람밖에 없어서인지 재고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다른 매장에 알아볼 생각은 않고 없는 게 당연하다는 듯 딴 일을 한다. 하는 수 없이 물량이 되는 제품만을 사서 나오자 여직원은 오늘 장사 다 한 것처럼 싱글벙글 이다.
콜롬보역으로 다시 돌아와 맡겨놓은 배낭을 찾아 네곰보(Negombo)로 가는 기차에 오른다. 기차 안이 콩나물시루다.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언감생심이고 움직이지도 못한 채 땀만 비 오듯 한다. ‘이를 줄 알았다면 버스를 탈걸.’하며 후회를 해보지만, 기차는 목적지를 향해 신나게 달려가고 있다. 기차는 가는 역마다 모두 선다. 이마에서 땀이 물방울이 되어 떨어진다. 철길과 동네 사이에 경계 칸막이도 없이 기찻길 바로 옆이 사람이 사는 동네다. 기차가 서기라도 하면 기찻길은 사람이 다니는 통로가 되어버린다. 위험을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예스러운 것인지 헷갈릴 정도이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후에야 네곰보역에 도착한다.
비수기 때의 여행은 참으로 편하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가는 곳마다 융숭한 대접을 받을 뿐만 아니라 혼잡하지 않고 느긋하게 여행을 할 수 있어 좋다. 찾아간 네곰보의 리조트에 우리밖에 없다. 수영장이 딸린 대형 리조트가 독차지다. 해먹(Hammock)에 앉으려다 몇 번이고 꼬꾸라져도 부끄럽지 않고 수영장에 뛰어들어 개헤엄을 쳐도 어색하지가 않다. 선베드(Sun Bed)에 누워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들이켜면 천상이 따로 없다. 늦은 밤 야자수 아래 바(Bar)에 앉아 '이미자'의 노래를 들으며 낭만의 세계로 빠져들어도 누구 하나 나무라지 않아 좋다.
이른 새벽, 네곰보 수산시장(Negombo Fish Market Complex)으로 가기 위해 택시나 바자지(Bajaj, 일명 툭툭이)를 기다려 보지만, 이른 새벽 시간이라 그런지 잡아타기가 여간 어렵지가 않다. 한참을 기다려 탄 바자지는 어둠을 뚫고 네곰보 시내를 가로질러 시장 입구에 세워진다. 기사에게 돈을 건네자 위조지폐라며 다른 돈을 달라고 한다. 무슨 소린가 싶어 지폐를 자세히 보니 ‘X’ 표시를 크게 그어 놓았다. 외국인이 거스름돈으로 받은 돈이 위조인지 어떻게 알겠냐마는 졸지에 위조범이 된 것 같아 다른 지폐를 얼른 주고선 도망가듯 시장 안으로 들어선다.
시장은 입구부터 불야성을 이루며 시끌벅적하다. 여러 척의 배가 한꺼번에 항구에 들어오면 한 무리의 사내들이 산더미만 한 참치를 메고 공판장으로 가는 모습은 장관을 이룬다. 더 놀라운 것은 참치의 가격이다. 잘생긴 참치의 가격을 물어보자 우리를 식당 주인인 줄 알았는지 25kg이라며 7만 원에 가져가라고 한다. 아무리 못해도 몇십만 원은 될 성싶은데 무지 싸다. 싱싱한 참치에 넋을 놓고 있을 때 시장 한구석에 사람들이 모여 있어 뭔가 싶어 비집고 들어가 본다. 큰 고기를 원하는 부위와 크기대로 자르는 노점상이다. 넓적한 큰 칼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노는 젊은 칼잡이의 솜씨가 장난이 아니다. 몇 번의 칼질에 고기는 정확하게 동강이 나버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마대나 봉지에 담겨 건네진다. ‘달인’이 따로 없다. 시장 어느 곳엔가는 또 다른 ‘달인’이 삶의 수단으로 솜씨를 뽐내고 있을 것이다. 다양한 종류의 생선과 그 크기에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놀라지 않을 수가 없어 동이 틀 무렵까지 시장을 누비고 다닌다.
펄떡거리던 새벽 어시장은 동이 트자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시장 가게들이 문을 열기 시작하면서 또 다른 모습으로 바뀐다. 시끄러운 경적과 함께 교복 입은 학생과 바삐 오가는 이들로 도시는 기지개를 켜고 스리랑카를 떠나려고 택시를 기다리는 배낭여행자도 어느새 도시 속의 한 풍경이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