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 귀감으로 삼을 효행을 찾아 역사 속으로
[어버이날] 귀감으로 삼을 효행을 찾아 역사 속으로
  • 이동백 기자
  • 승인 2020.05.07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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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사회에서 외면당하는 부모 부양 문제
부모에게 행한 만큼, 자식에게 돌려받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시대에 맞는 효의 실천이 필요하다

가정의 달, 특히 어버이날(5월 8일)을 맞으며 효의 중요성과 그 가치를 되돌아보게 된다.

통계청 ‘2017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2017년 11월 1일 기준, 65세 이상 고령 인구가 14.2%에 달함으로써 우리나라는 고령 사회로 진입했다. 지난 2000년 고령화 사회로 들어선 지 17년 만의 일로서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된 것이다.

고령 인구가 이처럼 빠른 속도로 늘어남에 따라 부모 부양이 사회 문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보건사회연구원에서 발표한 ‘중·장년층의 이중부양 부담과 정책 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부모 부양 책임자로 가족을 꼽은 비율이 2002년 70.7%이던 것이 2010년 36.0%, 2018년 26.7%로 감소했다.

생산 연령과 고령 인구 비중 추이. 자료: 통계청

 

이는 효(孝)를 기반으로 하는 가족주의가 약해지고 핵가족화가 심해짐에 따라, 우리나라 국민의 부모 부양 가치관과 태도도 급변한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사회 변천에 따라 효의 효용성이 그만큼 후퇴한 것이다.

공자는 효를 온갖 행실의 근본이라고 했다. 모세의 십계명과 불교의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에서도 효의 실천을 강조했다. 이처럼 효는 종교를 초월하고, 동서고금 할 것 없이 중요하게 여긴 실천 덕목이었다. 짐승도 부모의 은혜를 안다. 까마귀는 어릴 때 자신을 먹여 살린 어미가 늙어 날갯짓하지 못할 때, 어미가 한 것처럼 먹이를 사냥해서 어미를 봉양하는 새이다. 까마귀의 효를 반포지효(反哺之孝)라 한다. 짐승도 이러할진대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서 인간 사회에서 효를 가볍게 여길 수 없는 노릇이다.

 

우리 역사 속에서 귀감이 될 효의 사례를 살펴본다.

효녀 지은의 이야기가 실린 삼강행실도
효녀 지은의 이야기가 실린 삼강행실도

신라 때 효녀 지은은 어머니 모르게 종이 되어 일한 대가로 쌀을 얻어 어머니를 봉양했다. 어머니가 “전에는 밥이 거칠어도 맛이 좋더니, 지금은 밥이 좋아도 뱃속을 칼로 에는 듯하니 어쩐 일이냐”라고 물었다. 지은이 사실을 밝히자, 어머니는 “네가 나 때문에 종이 되었으니, 내가 빨리 죽느니만 못하다”며 둘이 목 놓아 울었다. 지나가던 효종랑이 이를 보고 감동하여 쌀 백 석과 옷을 보내주었고, 효공왕도 곡식 오백 섬과 집을 하사하여 모녀가 잘 살도록 해 주었다.

신라 시대 모량인 손순은 가난 때문에 품팔이하여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어린 아들이 어머니가 드시는 음식을 빼앗아 먹었다. 손순은 아내와 귀산으로 가서 땅을 파 아이를 묻으려는데, 땅 속에서 돌종[石鐘]이 나왔다. 그는 아내에게 이르기를 “이런 기이한 물건을 얻음은 아마도 아이의 복인 듯하니, 아이를 묻어서는 안 되오” 하고는 아이를 데리고 돌아와서 돌종을 대들보에 매달아 놓고 두드리니, 소리가 궁궐에까지 들렸다. 흥덕왕은 이 종소리를 듣고 “종소리가 맑고 멀리까지 울려 퍼지니 이상하다.”하고는 찾게 하여 이 사실을 알았다. 왕은 손순에게 집 한 채를 주고, 해마다 곡식 오십 섬을 내려주었다.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데, 역병에 종기까지 나서 어머니가 거의 죽게 되었다. 밤낮으로 정성을 다하여 섬겼으나, 봉양하기 어렵게 되자 자기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먹이고, 어머니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내었다. 왕이 이 사실을 전해 듣고 집과 양식을 내리고, 비석을 세워 그 효행을 널리 알리도록 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공주 사람 향덕의 효행이다.

향덕의 효심을 그린 삼강행실도
향덕의 효심을 그린 삼강행실도.

고려 시대 최누백은 아버지가 사냥을 나갔다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자, 15세의 어린 나이에도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호랑이를 잡아 그 뱃속에서 아버지의 시신을 꺼내 장사지냈다.

조선시대 오현의 한 사람인 정여창은 그의 어머니가 이질을 앓았을 때 향을 피워 놓고, 어머니의 아픈 몸을 자신의 것과 바꿔 달라고 빌었다. 어머니의 아픔을 느끼기 위해 기둥에 머리를 부딪쳐 피를 내고, 그 피가 적삼을 흥건히 적시게 했다.

한편 집을 지어 효도한 일도 있다. 조선 중종 때 농암 이현보는 94세의 아버지 이흠과 92세의 숙부, 82세의 외숙부 김집을 중심으로 구로회(九老會)를 만들어 즐겁게 소일할 수 있도록 경로당을 짓고, 당호를 애일당(愛日堂)이라 했다.

오른쪽 바위 위에 애일당을 그린 분천헌연도.
오른쪽 바위 위에 애일당을 그린 분천헌연도.

 

오늘날의 현실에 비춰보면, 이들의 효행은 실천하기 어려울뿐더러 비현실적인 일로 여겨진다. 효를 옛날 그대로 실천하라는 뜻이 아니다. 효행의 바탕에 깔린 정신을 귀감으로 삼아 현실에 맞는 효행 방법을 찾아 행하자는 것이다. 나무는 조용하고자 하나, 바람이 멈추어 주지 않듯이 효도에도 때가 있다. 부모에게 행한 만큼, 자식에게 돌려받는다는 것 또한 명심할 일이다.

가정의 달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노계 박인로의 시조 한 수 읊조리며, 부모 섬기는 일에 흔쾌히 나서기를 기대한다.

왕상이 잉어 잡고 맹종이 죽순 꺾어

검던 머리 희도록 노래자의 옷을 입고

일생에 양지성효를 증자같이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