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자의 '인연'
김해자의 '인연'
  • 김채영 기자
  • 승인 2019.12.12 18:01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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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의 ‘인연’

 

너덜너덜한 걸레

쓰레기통에 넣으려다 또 망설인다

이번에 버려야지, 이번엔 버려야지, 하다

삶고 말리기를 반복하는 사이

또 한 살을 먹은 이 물건은 1980년 생

연한 황금색과 주황빛이 만나 줄을 이루고

무늬 새기어 제법 그럴싸한 타올로 팔려온 이놈은

의정부에서 조카 둘 안아주고 닦아주며 잘 살다

인천 셋방으로 이사 온 이래

목욕한 딸아이 알몸을 뽀송뽀송 감싸주며

수천 번 젖고 다시 마르면서

서울까지 따라와 두 토막 걸레가 되었던

20년의 생애,

더럽혀진 채로는 버릴 수 없어

거덜난 생 위에 비누칠을 하고 또 삶는다

화염 속에서 어느덧 화엄에 든 물건

쓰다쓰다 놓아버릴 이 몸뚱이

 

시집 ‘축제’ 애지. 2007. 11. 15.

 

할머니는 손발톱이나 부지깽이에도 혼魂이 있다고 하셨다. 함부로 버리면 도깨비가 되어서 밤길에 나타난다고 겁을 주셨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막 대하지 말라는 교훈이었던 것 같다. 사물도 정들기 마련이다. 십 몇 년간 같이 늙어가는 냉장고라든가 세탁기를 보면 가족의 일원처럼 느껴진다. 손때 묻고 추억 어린 물건들을 쉽사리 버리지 못하는 것은 정 떼기가 저어해서다. 하물며 사람 사이의 인연은 어떻겠는가. 고백하자면 나는 까다로운 성미다. 호불호가 분명해서 쉽게 인연을 만들지 못한다. 상처를 잘 받는 예민한 성향이 문제다. 내 촉을 믿고 아니다 싶으면 애초부터 거리를 둔다. 반면에 기다 싶으면 적극적으로 유지해가는 타입이다.

이 시는 ‘너덜너덜한 걸레’가 시적 소재로 사용되었다. 걸레가 된 수건 한 장을 이토록 면밀히 들여다보는 시인의 마음이 따습다. 이처럼 시는 거창한 데서 출발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입구는 작지만 출구는 대단하다. 수건이 걸레가 되어서 화엄에 들기까지의 여정을 조곤조곤 들려준다. ‘쓰레기통에 넣으려다 또 망설인다’, 이게 보편적인 주부들의 마음이다. 어렵거나 복잡한 수사법을 사용하지 않아서 독자층이 그만큼 넓을 것 같다. ‘20년의 생애’에서 알 수 있듯이 타올의 한 생애가 화자의 삶과 상당 기간 궤를 같이한다. 걸레가 불성(佛性)으로 확장되면서 시의 완성도가 높아진다. ‘놓아버릴 이 몸뚱이’ 걸레와 나를 동격으로 만듦이 압권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