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나타난 인간의 심리
(21)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나타난 인간의 심리
  • 김영조 기자
  • 승인 2019.07.23 08:0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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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위하여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레프 톨스토이  위키백과
레프 톨스토이 위키백과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의 단편 중 가장 우수한 작품이다. 주인공 이반 일리치(Ivan Illich)의 죽음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리치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심리 묘사가 사실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일리치는 정부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싶고, 상류층을 동경하며 자랐다. 판사로서 자신의 사회적 역할에 충실하였다. 남다른 처세술로 자신의 지위를 보장받고 원만한 대인관계를 유지하였다.

보통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얼굴 예쁘고, 재산 있고, 괜찮은 가문의 딸과 결혼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아내의 간섭과 잔소리, 낭비벽이 심해지자 가정에 회의를 느끼고 자신의 일(직업)에 몰두하는 것으로 도피수단으로 삼았다.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이었던 그에게 죽음이 닥쳐왔다. 가벼운 부상이 원인 모를 병으로 악화되어 45세에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죽음에 임하여 그는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이라는 퀴블러-로스(Elisabeth Kübler-Ross)의 죽음의 5단계 과정을 밟는다. 발병 초기에 자신의 죽음을 부정한다. 그러나 고통이 심화될수록 죽음이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고 두려움에 빠진다.

그리고 왜 자신이 이렇게 죽어야 하느냐며 분노한다. 특히 자신의 고통과 죽음에 대해 아무도 알려고 하지도 않고, 불쌍히 여기지도 않고, 그저 자기들끼리 즐겁게 놀기만 하는데 대해 깊은 분노를 느낀다.

그는 품위 있게 살아온 삶이 고작 병 때문에 끝나야 한다는 사실에 비참함을 느낀다. 그리고 고통과 근심,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일에 더욱 몰두하며 죽음과 타협한다.

그러나 병세는 호전되지 않고 건강은 나날이 악화된다. 그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체념한다. 거짓된 위로와 희망으로 그의 고통을 외면하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어떠한 유대감을 느끼지 못한 채, 극심한 고립감과 외로움을 느낀다.

뒤늦게 죽음을 인정하고 삶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 자신이 완전히 잘못된 방식으로 살아온 것을 반성하고 새롭게 무엇을 시작해보려 한다. 평생을 자신이 아닌 타인에 기준을 두고 살아왔기 때문에 정작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고통스럽게 병마에 저항하며 살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이미 회복할 수 없는 건강 상태가 된 그는 결국 숨을 거두고 만다.

 

그는 모범적이고 성공적인 삶을 영위하려고 했다. 명예와 지위를 중시하고, 엄격하고 절제된 생활방식으로 품위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상류층 사람들과 친교를 맺고, 남에게 뒤지지 않을 조건의 여성을 결혼상대로 구하였다.

그러나 죽음에 직면하여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면 카드놀이의 행복감, 사교계에서의 즐거움, 업무에서의 성공, 많은 봉급과 윤택한 생활 등 모든 삶의 양상들이 부질없게 느껴진다.

참된 자아, 진실된 삶이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의 방식을 답습하고 모방한 삶의 방식이었다. 다분히 이기적이고 계산적이었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말하는 본래적 실존의 삶이 아닌 비본래적 실존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는 죽음에 직면하여서야 자신의 삶의 방식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후회하며 분노한다. 그를 가장 분노케 한 것은 그의 죽음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행태이다.

그들은 그가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병이 들었을 뿐이라고 안심시킨다. 안정을 취하고 치료만 잘한다면 곧 좋아질 것이라고 위로한다. 뻔한 거짓말이고, 근성으로 하는 형식적인 말이다.

동료들은 병문안과 조문으로 참가하여 온갖 미사여구로 위로와 애도를 표한다. 그것은 진정성이 없는 위선에 불과하다. 그의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애써 무시하고, 그들 자신들의 죽음이 아니라 일리치의 죽음인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오히려 그가 언제 죽을지, 왜 시간을 끄는지 궁금해 한다.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기보다 그가 죽으면 자신들의 승진이나 이해관계에 어떤 영향을 줄지에 더 관심이 높다. 솔직히 그의 죽음 소식과 조문 가는 일 자체가 귀찮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아내도 남편의 질병과 죽음을 슬퍼해주기는커녕 언제 이 지긋지긋한 병간호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지 초조해한다. 남편의 죽음으로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연금을 국가로부터 받을 수 있을지에 열중한다. 그녀가 슬퍼한 것은 남편의 죽음이 아니라 남편의 죽음으로 경제적 손실이 생기고, 더 이상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결혼을 앞둔 딸은 병으로 인해 죽어가는 아버지가 자신의 미래에 안 좋은 영향을 주지 않을까 염려한다.

판사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사회 최상위급 직업인이다. 다른 사람의 생사여탈(生死與奪)을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권한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죽음 앞에서 보잘 것 없는 나약한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다른 사람을 심판하던 그가 이제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죽음 앞에서는 권력도, 지위도, 명예도, 재산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는 죽음에 이르러서야 진정 자신이 원한 것은 가족의 사랑임을 깨닫는다. 평소 관계가 멀던 막내아들의 뜨거운 눈물에 사랑을 느낀다. 평소 자만심 많고,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던 그는 시중드는 젊은 하인의 진실된 마음을 통해서 처음으로 따뜻하고 진심어린 보살핌과 배려를 알게 된다.

그러나 그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의 의미를 깨닫고, 반성하고 후회하기에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그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삶의 의미를 잊어버린 채 자신의 출세와 명예와 품위를 지키는 데만 급급하며 살아왔다.

그가 주위 사람들의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삶의 모습에 증오하고 분개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분개해야 할 일이다. 그 자신도 다른 사람의 죽음 앞에서 그러한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행태를 취해왔기 때문이다.

죽음은 누구나 겪는 보편적이고 필연적이라는 사실이다. 죽음은 삶과 분리된 것이 아니고 삶의 한 부분이다.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알 수 있고, 삶 가운데 죽음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로마시대 개선 장군 옆에서 죽음을 기억하라며 외치던 ‘memento mori’의 정신을 진작 알고 평소에 실천했더라면 후회는 없었을 것이다. 하이데거의 죽음으로의 선구(先驅)’를 통하여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았더라면 더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타인이 대신할 수 없듯이 자신의 삶을 타인이 대신할 수는 없다. 하나뿐인 생명, 한번밖에 영위할 수 없는 삶을 보다 가치 있고 의미 있게 하도록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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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신호 2019-07-23 20:45:12
자기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