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한 죽음, 잠들지 못하는 영혼’ 경산 폐코발트광산 발굴 유해 세종시 안치
‘억울한 죽음, 잠들지 못하는 영혼’ 경산 폐코발트광산 발굴 유해 세종시 안치
  • 이상유 기자
  • 승인 2019.07.01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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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0여 희생자 유해 중 500여구만 수습, 추가 발굴 재개해야

지난 6월 26일 오전 경산시 평산동 산 42-1번지 폐코발트 광산 유해 발굴 현장 컨테이너 창고 앞 공터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엄숙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날 행사는 한국전쟁 당시 경산 폐코발트 광산 및 인근의 대원골 일원에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민간인 희생자의 유해 중 15~19년 동안이나 이곳 현장 컨테이너에 보관되어 있던 80여구의 유해를 세종시에 있는 임시 안치소로 이송하기 위한 위령제였다. 행사는 천도제를 시작으로 전통제례, 유해이송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경산 폐코발트광산 유해 발굴 작업은 2001년부터 6차례에 걸쳐 총 500여구의 유해를 수습하였으나 그 중 국가기관인 ‘진실화해위원회’가 수습한 420구만 충북대 박물관을 거쳐 세종시 추모의 집에 안치되었다. 나머지 80여구는 국가기관이 아닌 유족들이 발굴했다는 이유로 그동안 이곳 현장 컨테이너에 보관되어 있다가 이날 세종시의 임시 안치소로 떠나게 되었다.

유해 이송을 위한 천도제가 열리고 있다. 사진  이상유 기자
유해 이송을 위한 천도제가 열리고 있다. 사진 이상유 기자
이송을 기다리고 있는 유해. 사진 이상유 기자
이송을 기다리고 있는 유해. 사진 이상유 기자

 

경산 코발트광산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후반 일제에 의해 개발된 군사용 광산으로 당시에는 보국광산으로 불렸다. 1942년 폐광될 때까지 태평양전쟁 등에 드는 군사용 코발트를 공급했는데 현재 경산시 상방동 경상병원 앞 제련소에서 1차 가공한 후 케이블카로 경산역으로 운반된 뒤 철도를 통해 부산항으로 옮겨져 일본으로 코발트를 수송했다.

이 광산은 2차 대전 종전 직전 폐광된 후 방치되어 있다가 산 전체가 거미줄처럼 뚫린 코발트 광산의 특성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규모 민간인 학살 적지로 지목되어 1950년 7월 20부터 9월20일까지 대구형무소 재소자와 경산, 청도지역 ‘보도연맹원’ 약 3,500여 명이 이곳에서 군·경에 의해 학살되었다.

당시 경산과 청도․ 영천 등 인근 지역 ‘국민보도연맹원’들이 경찰에 의해 지서단위로 예비검속을 당한 뒤 경산경찰서 등 해당 지역 경찰서에 인계된 후 광산으로 보내지거나 CIC(방첩대)에 의해 예비 검속된 뒤 바로 광산으로 보내져 학살당했다.

‘국민보도연맹원’이란 1948년 12월 시행된 국가보안법에 따라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사상 전향시켜 이들을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취지와 국민의 사상을 국가가 나서서 통제하려는 이승만 정권이 대국민 사상통제를 목적으로 1949년 6월 5일에 만든 ‘국민보도연맹’이란 조직에 관여한 사람들을 말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들이 인민군에 가담하거나 기타 부역행위를 할 것을 우려하여 전국에서 이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경산 코발트광산 민간인학살 유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보도연맹원’들은 대부분 좌익사상이나 반국가 활동과는 무관한 단순 가담자나 부역자, 동조자였으며 직업도 농민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그들은 포승줄로 묶인 채 군용트럭으로 폐코발트 광산으로 끌려와 수직갱도 입구에 나란히 세워진 뒤 총살되거나 산 채로 수장되었다. 일부는 도끼 같은 예리한 흉기로, 일부는 기름에 태워져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동안 유해 발굴은 2001년, 2004년, 2005년 등 3차례에 걸쳐 민간차원에서 있었고 2007∼2009년 3차례는 국가 차원의 발굴이 이루어졌다.

정부에서는 당시 숨진 인원을 2천여 명으로 보고 있지만 경산 코발트유족회는 3,500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유족회 측은 “3500여명 가운데 현재 14%인 500여 유해가 발굴됐을 뿐이다. 현재 국회에 계류된 제2 특별법을 빨리 제정해 추가 발굴을 시작해야 한다”고 밝혔다.

발굴된 유골의 모습-1.  사진 코발트 유족회 제공
발굴된 유골의 모습-1. 사진 코발트 유족회 제공

 

이날 기자는 최승호(코발트광산유족회 이사) 씨의 안내로 현장 취재를 나온 모 방송사 기자와 같이 그동안 작업이 중단된 유해 발굴 현장을 들어가 보았다.

지하갱도 입구에서부터 허리를 굽혀 지하수가 질퍽거리는 갱도를 따라 100m 정도 들어가자 수평갱도와 수직갱도가 합류되는 지점에 유해 발굴 작업을 하던 현장이 그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흙더미 옆에 안전모를 비롯한 작업도구들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고 유해의 잔해가 섞여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흙을 담은 마대자루가 갱도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또한 유해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뼛조각도 현장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최승호 이사의 설명을 들으며, 아직도 이곳에 억울한 죽임을 당한 수많은 희생자의 유해가 파묻혀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하루빨리 유해 발굴 작업이 재개되어 그분들의 영혼이나마 평온하게 잠들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현재 유해 발굴 작업이 진행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진실화해특별법’이 지난 2010년에 종료됐기 때문에 추가로 유골을 발굴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가 없는 상황이며 추가로 발굴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국회에서 특별법을 제정하는 등의 절차가 선행돼야 한다고 한다.

유해 발굴 현장으로 들어 가는 갱도.  사진  이상유 기자
유해 발굴 현장으로 들어 가는 갱도. 사진 이상유 기자
발굴이 중단된 현장의 모습. 사진  이상유 기자
발굴이 중단된 현장의 모습. 사진 이상유 기자
유해의 잔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대자루가 쌓여있다.  사진  이상유 기자
유해의 잔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대자루가 쌓여있다. 사진 이상유 기자
유해 발굴 현장에서 수습되지 못한 뼛조각. 사진 이상유 기자
유해 발굴 현장에서 수습되지 못한 뼛조각. 사진 이상유 기자
유족회 최승호 이사가 현장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이상유 기자
유족회 최승호 이사가 현장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이상유 기자

 

한편, 유족회의 최승호 이사는 “코발트 광산을 역사평화공원으로 조성하고 이곳에 기념관 건립 사업을 추진 중이지만 경산시의 소극적인 자세 때문에 진척이 되지 않는다. 역사평화공원이 조성되면 이곳에서 위령제와 함께 반전 평화 인권 축제를 열고 학생들이 참여하는 평화 인권 교육 장소로도 활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경산시에서는 “2016년에 건립한 위령탑 바로 옆의 사유지를 사들이는 문제 때문에 기념관과 공원 조성사업이 차질을 빚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참고자료-코발트유족회 제공자료. 위키백과

폐코발트 광산 앞에 세워져 있는 위령탑.  사진 이상유 기자
폐코발트 광산 앞에 세워져 있는 위령탑. 사진 이상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