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 산책]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사후생(死後生)'
[장서 산책]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사후생(死後生)'
  • 김대영 기자
  • 승인 2023.08.28 15:3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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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이후의 삶의 이야기

저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sabeth Kübler Ross)는 미국 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20세기 100대 사상가’ 중 한 명이며, 죽음과 임종에 관한 세계적인 권위자다. 1926년 스위스에서 세쌍둥이 중 첫째로 태어나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로 평생을 봉사하다 2004년 세상을 떠났다. 취리히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국가 인정 의사가 된 후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맨해튼주립병원에서 정신과 의사로 일했고 시카고대학교에서 정신의학을 가르쳤다. 저서로 <죽음과 죽어감>, <인생수업>(공저), <상실수업>(공저) 등이 있다.

이 책의 목차는 ‘제1장 사는 것과 죽는 것, 제2장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제3장 삶과 죽음, 죽음 뒤의 삶, 제4장 부모의 죽음’으로 되어 있으며, 부록으로 최준식 교수가 쓴 ‘한국인의 죽음관’이 있다. 1장과 2장의 내용을 요약한다.

인간의 육체적 죽음은 나비가 고치에서 벗어날 때의 현상과 똑같다. 인간의 몸은 고치에 비유될 수 있다. 우리 몸은 잠시 살기 위한 집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참 자아는 아니다. 상징적으로 비유하자면 죽음은 그저 ‘한 집에서 더 아름다운 집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고치(몸)가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되면 나비(영혼)가 태어난다. 자살이나 살인, 심장마비 혹은 만성질환이나 다른 어떤 사인(死因)이라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고치에서 나비로 변하는 첫 단계를 거치면 두 번째 단계에 접어든다. 첫 번째 단계에서 물질적 에너지를 받았다고 한다면, 두 번째 단계에서는 정신적 에너지를 받는다. 뇌를 포함한 육체(고치)가 손상되는 순간부터 더는 깨어있는 의식을 지니지 않는다. 고치에 손상이 생겨 호흡할 수 없고 맥박도 뛰지 않으며 뇌파도 측정되지 않는 상태가 될 때, 나비는 고치를 떠나버린다. 이것은 반드시 죽었다는 것을 뜻한다기보다 고치가 더는 기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고치에서 벗어나자마자 죽음은 정신적 에너지를 받는 두 번째 단계에 이른다. 정신적, 물질적 에너지는 인간이 운용할 수 있는 유일한 두 가지 길이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내려준 가장 큰 선물은 자유의지다. 존재하는 것 가운데 오직 인간에게만 자유의지가 있다. 인간은 이 힘을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방법으로 사용할 수 있다. 영혼이 육체를 떠나자마자, 몸에서 빠져나온 곳이 어디든 간에(병실이나 사건의 현장이나), 우리는 죽음을 맞는 장소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지각할 수 있다. 이때 우리는 이승에서의 의식으로 그런 사건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식으로 받아들인다. 혈압이나 맥박이 뛰지 않고 호흡이 멈췄거나 뇌파가 측정되지 않는 동안에도 우리는 이 새로운 인식 속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개를 부르는 호루라기를 불면 사람들은 못 들어도 개들은 모두 듣는다. 인간의 귀는 높은 주파수를 감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처럼 보통 사람은 육체를 빠져나간 영혼을 볼 수 없다. 반면에 몸에서 빠져나온 영혼은 이승에서 진동되는 것을 감지할 수 있으며 사건이 생긴 장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 수 있다.

깊은 혼수상태에 빠져 죽어가는 어머니나 아버지의 머리맡에 다가갈 때, 우리는 이분들이 우리가 말하는 것을 모두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잘못했습니다!”, “사랑합니다!” 혹은 평소에 마음 깊이 말하고 싶었던 어떤 말을 하더라도 늦은 게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때에도 당신의 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10년이나 20년 동안 마음에 담아두었던 풀지 못한 응어리를 풀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죄의식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다.(17~21쪽)

우리는 이 두 번째 단계에서 아무도 고독하게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육체를 떠나면 시간이 없는 곳에 존재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이 상태에서는 누구도 일상의 감각 차원에서 갖는 공간 감각이나 거리 감각을 느끼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인간 세상에서만 통용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육체에서 벗어난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누구라도 방문할 수 있다. 게다가 당신보다 먼저 돌아가셨지만 당신을 무척 사랑하고 아껴주었던 분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이 차원에서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스무살 때 아이를 잃은 사람이 아흔아홉 살에 죽더라도 그의 아이를 어린아이 때의 그 모습 그대로 만날 수 있다. 저승에서의 1분은 이승 시간의 백년과 같다.

두 번째 단계에서 자신의 몸이 다시 온전해지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난 후, 우리는 죽음이란 단지 또 다른 형태의 삶으로의 변화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당신은 이승에서의 육체적인 형태가 더는 필요 없어서 육체를 떠나온 것 뿐이다. 그런데 당신은 육체를 빠져나와 영원한 존재의 형태로 바뀌기 전에, 물질세계에서 있었던 일들이 모두 그대로 남아 있는 단계를 통과한다. 그 단계는 터널을 뚫고 가거나 문을 통과하는 것, 다리를 건너는 것과도 같다.

이 터널이나 다리 혹은 산길을 지난 후에 그 끝에서 당신은 빛에 에워싸인다. 이 빛은 흰색보다도 더욱 하얗다. 이 빛은 말할 수 없이 밝아서 당신이 그 빛에 가까이 다가설수록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장엄한, 조건 없는 사랑이 당신을 감쌀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말이 필요없다.

근사체험을 겪은 사람이라면 짧은 순간 동안 이 빛을 볼 수 있다. 이 빛을 본 후에 그는 되돌아와야 한다. 그러나 당신이 정말로 죽을 때에는 고치와 나비 간의 연결이 단절된다. 이렇게 되면 이승의 몸으로는 영원히 되돌아오지 못한다. 빛의 존재를 본 후에 아무도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당신은 되돌아오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 빛 속에서 당신은 당신이 살아가는 동안에 어떤 사람이 될 수 있었는가를 생각할 것이다. 여기에서 당신은 이 빛으로부터 당신을 심판하지 않고 이해하는 조건 없는 사랑을 경험한다. 많은 이들이 예수, 하느님 혹은 사랑에 비유하고 있는 이 엄청난 빛의 출현을 통해, 이승에서의 당신의 모든 삶이 어떤 시험을 통과하거나 특별한 교훈을 배우고자 거쳐야만 하는 학교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학교를 끝내고 수업을 마치자마자 당신은 졸업생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왜 귀여운 어린아이들이 죽어야만 합니까?” 그 대답은 간단하다. 그 아이들은 사람이면 누구나 배워야 할 것을 아주 짧은 기간에 배운 것뿐이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기 전에 배워야 할 모든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조건 없는 사랑’이다. 이것을 배우고 실행했다면 당신은 모든 교과과정을 훌륭하게 마친 것이다.

빛 속에서, 하느님이나 그리스도 혹은 당신이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든 간에 그것의 출현 앞에서, 당신이 태어난 첫날부터 마지막날까지의 삶을 되돌아봐야 한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봄으로써 이제 당신은 세 번째 단계에 다다른다. 이 세 번째 단계에서는 첫 번째 단계와 두 번째 단계에 있던 의식이 없어진다. 그리고 이제 당신은 앎(knowledge)을 소유하게 된다. 당신은 순식간에 이승에서 사는 동안의 순간순간의 모든 생각을 자세하게 알게 된다. 즉 모든 행동을 기억하게 되고 당신이 내뱉은 모든 말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요약해서 말한 것조차도 당신이 알게 될 아주 작은 부분에 속할 뿐이다. 왜냐하면, 이 단계에서 당신은 당신의 생각과 말, 행동이 어떤 결과를 생기게 했는가를 모두 알게 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조건 없는 사랑이다. 이승에서의 삶을 되돌아보는 동안, 당신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 하느님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성숙할 많은 기회를 무시해버린 당신 자신을 성찰할 수 있기에, 최악의 적은 바로 당신 자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당신은 오래전 불이 나서 집이 타버렸던 일, 아이가 죽었던 일, 남편이 상처를 입혔던 일, 심장병으로 고통받았던 일 등과 같은 치명적인 사건들이, 인간이면 반드시 배워야 할 이해와 사랑 속에서 우리 자신의 성숙을 위해 존재했던 많은 가능성 중의 몇몇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신은 “그런 기회들을 현명하게 사용하는 대신에, 이 모든 사건들을 분노와 부정적인 힘이 자라나게끔 나쁘게 이용해왔다”라고 후회할 것이다.(27~35쪽)

우연한 일치란 없다. 하느님은 형벌을 내리는 비열한 하느님이 아니다. 변화, 즉 죽음을 겪은 후 우리는 지옥이나 천국으로 묘사됐던 그곳으로 간다. 죽었다가 깨어나 우리와 이야기를 나눈 친구들에게 들은 바로는, 이런 변화를 거친 후에 인간은 텔레비전 스크린과 매우 유사해 보이는 어떤 것 앞에 서게 된다. 여기에서 당신은 판결을 내리는 신에 의해 심판받는 것이 아니라, 평생 해왔던 모든 행동과 말, 모든 생각들을 되돌아 보게 됨으로써, 당신이 당신 자신을 심판하는 기회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당신이 살아온 방식에 따라 자신이 지옥을 만들거나 천국을 만드는 것이다.(76~77쪽)

부록에서 '한국인의 죽음관'에 대해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교와 무속신앙의 영향으로 현세의 삶을 중요시하며, 죽음 이후의 삶은 외면하거나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한국인의 절반 정도는 내세 혹은 윤회를 믿고 있는데, 이는 종교를 가진 사람의 숫자와 비슷하다. 이 책을 통해 죽음 이후를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스베덴보리의 위대한 선물'을 생각나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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