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모 (3)
녹슨 철모 (3)
  • 시니어每日
  • 승인 2019.04.15 0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말 반갑군요. 아시다시피 많은 미군들이 철수를 하면서 군원도 줄인 탓에 예하 부대에 지급해줄 약품이 정말 모자라요.”

분창장은 마치 10년 지기라도 되듯이 굳은 악수를 하며 말했다.

“하지만 군단만은 내가 힘자라는 데까지 잘 봐 드리겠소. 이미 들으셨겠지만 전번 의무실장처럼 '숏 테이지'를 잘 봐주셔야 해요.” 

김 대위는 능구렁이답게 인심 쓰듯 말했다. 숏 테이지라면 20~30% 정도의 약을 삥땅하고 전부 다 받은 걸로 사인해주는 군대용어이다.

“군단에는 장군들이 많으니까 그 애로사항이야 내가 더 잘 알지요. 그래도 숏 테이지 문제만 잘 협조되면 나 역시 실장을 적극 도와드릴 수가 있습니다. 장군님들이나 대령 참모님들의 약은 내가 책임지고 대어 들릴게요.” 

그는 세상사가 다 그런 게 아니냐는 투로 웃으며 이야기했다.

“고마운 말씀이네요. 하지만 저의 신상까지는 신경 써 주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장군이나 사병이나 같은 군인이 아닙니까? 저는 사병의 군의관입니다. 우리 각자 규정대로 해봅시다.” 

사실 우 중위는 말은 쉽게 했지만 큰 용기가 필요했다. 또 실제로 당장 이 분창장이 주먹이라도 흔들며 덤벼들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도 들었다.

“하하하, 오랜만에 옳은 군의관을 만났네. 그래 정말 옳은 말이오. 그렇다면 당신 말대로 그렇게 해봅시다." 

분창장은 예상 외로 시원시원하게 문제를 끝내 버렸다. 약 청구서를 제출하고 수령을 기다렸다. 약품 불출 담당 하사관이 이 약도 없고 저 약도 없다는 핑계를 대고 4분의 3톤 짜리 앰블런스의 바닥에 깔리는 정도의 분량만 주었다. 앰블런스가 분창을 나서 통일로로 꺾어 들자 운전병이 말했다.

"실장님, 어디로 갈까요?" 

이건 또 무슨 질문인가? 부대로 가지 어디로 간단 말인가.

"이 상병, 전에는 어디로 갔어?" 우 중위는 신참 티를 내며 물었다.

"금산 도립병원으로요.” 

운전병이 뭘 그런 걸 다 묻느냐는 투로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우 중위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처음 보는 의정장교가 시장 상인처럼 약품 지출에 에누리를 제의하지 않나, 앰뷸런스 운전병이 도립병원으로 가자고 하지를 않나, 정말 이상한 동네로 잘못 들어온 기분이었다.

부대에 돌아와 약품을 내리자 이를 보고 있던 선임하사 이 상사의 얼굴이 우거지상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새 의무실장이 오자마자 첫 수령한 약을 다 팔아먹고 이렇게 차 바닥에 약을 깔고 나타나다니...’ 오랜 하사관 생활에 이만큼 간이 크고 뻔뻔한 군의관은 처음 봤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시작이 반이라고 하는데 정말 어렵게 군단 의무실 업무가 시작되었다. 제기랄! 분창장에게 밉보이고 선임하사에게 의심받고 우 중위의 군단 의무실장 생활은 이렇게 고달프게 시작되었다.

군단에는 의무참모가 따로 없었다. 군단 예하 부대의 의무행정은 인사처에서 일을 하고 보급 관계는 군수처에서 일을 나누어 하고 있었다. 물론 군단 소속의 야전병원이 있었지만 그 병원장은 의무참모 역할은 없었다. 군단에서 실제로 그가 하는 일은 없었다. 우 중위에게는 업무상 일은 인사처와 군수처의 명을 받아 하지만 막상 문제가 생길 경우 그를 감싸줄 참모가 없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