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실(齋室) 이야기] 파평(坡平) 윤씨(尹氏) 재실, 일우재
[재실(齋室) 이야기] 파평(坡平) 윤씨(尹氏) 재실, 일우재
  • 우남희 기자
  • 승인 2021.04.20 17:0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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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일에 세일사(歲日祀)를 봉행하는 시랑공파 문중

대구시 달성군 옥포읍 신당리는 도심 속의 농촌이다.

주요 농산물은 이모작으로 모내기와 비닐하우스에 수박, 토마토, 참외 등 특수작물을 재배한다. 광주대구고속도로와 대구와 마산을 잇는 중부내륙지선이 건너다보이는 곳에 위치하며 천연보호림으로 지정된 이팝나무 군락지가 있는 교항리 세청숲과 이웃한다.

신당리는 우리나라 성씨 가운데 관향별 인원 수로 여덟 번째인 파평 윤씨의 집성촌이다.

파평윤씨는 다른 성씨와 달리 시조의 탄생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경기도 파주군 파평산 기슭에 용연(龍淵)이라는 연못이 있는데 이 연못 속에 용인(龍人)이 살고 있어 연못이 불결하면 뇌성이 진동하고 풍우가 몰아친다고 한다.

신라 진성왕 7년(893년) 음력 8월 15일에 이 연못 위로 구름이 자욱하더니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옥함(玉函)하나가 연못 위에 떠올라 빨래하던 노파가 이 옥함(玉函)을 건져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오색의 우모(羽毛)에 싸여 있었다. 이가 바로 파평 윤씨 백만종인(百萬宗人)의 시조인 신달(莘達)이었다.

시조는 후삼국의 혼란기에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개국에 공을 세웠다. 후손이 이곳 신당리에 터를 잡은 것은 시조 신달의 15 세손인 휘(諱) 종창(宗昌) 때이다. 입향조인 종창 선조는 함남 북청에서 태어났으며 세조의 중앙집권 정책으로 함경도의 특혜가 없어지자 불만과 위기감이 누적된 토호층들이 이시애를 중심으로 난을 일으켰을 때 강순(康純) 등과 진압하였다. 그는 동생들을 두고 단신으로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구라리에 이주하여 살다 1470년 경인년, 이곳 신당리에 입향하여 지금까지 550여 년 동안 후손들이 문중(門中)을 이루며 살고 있다.

파평윤씨 시랑공파 재실 일시루의 정문인 현통문  윤승영 35세 손 제공
파평윤씨 시랑공파 재실 일우재의 정문인 현통문. 문중 총무 윤승영 제공

윤씨 문중은 1917년, 비슬산의 정기를 받고 낙동강과 금호강이 휘감아 도는 이곳 신당리가 서기(瑞氣) 어린 길상지(吉祥地)임을 알고 물심(物心)단결하여 선조들의 뜻을 이어받기 위해 재실인 일우재(逸友齋)를 창건하였다.

일우재라는 이름은 시조 20 세손으로 무과에 급제, 선전관에 출사하여 여러 무관직을 역임하고 임란 때에 전공을 세운 휘(諱) 범 장군의 장남인 휘(諱) 복(福)의 아호(雅號) 금락일수(琴洛逸叟)의 일자(逸字)와 차남 휘(諱) 적(迪)의 아호(雅號) 이우헌(二友軒)의 우자(友字)에서 각각 한자씩 따서 일우재(逸友齋)라 명명하였다.

일우재 전경   윤승영 제공
일우재 전경. 문중 총무 윤승영 제공

이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1.5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의 건물로 시랑공파 14 세손 휘(諱) 비(備)이하 선조 7위(位)의 비(碑)와 제단을 설치했다.

2004년 중건하면서 추가로 세 분인 11 세손 태위공(太尉公) 휘(諱 ) 안비(安庇), 12 세손 영평군(領平君) 휘(諱) 침(忱), 13 세손 상시공(常侍公) 휘(諱) 인달(仁達) 등의 비를 세워 총 10위(位)의 설단(設壇)을 갖추고 매년 한식일(寒食日)에 세일사(歲日祀)를 봉행하고 있다.

일우재 후원에서 한식일에 세일사를 봉행한다.  윤승영 제공
일우재 후원에서 한식일에 세일사를 봉행한다. 문중 총무 윤승영 제공

일우재는 솟을 대문인 현통문을 열고 들어가면 가운데 대청마루와 양쪽에 각각 방 1개씩을 둔 일자형 건물이며 부속 건물로 곳간채와 종친회의 및 망제를 지낼 때 사용하는 일우회관을 양쪽에 두고 있어 ㄷ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