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날] 남편의 편지-당신 요즘 좀 수상해요
[부부의날] 남편의 편지-당신 요즘 좀 수상해요
  • 김동남 기자
  • 승인 2020.05.20 09: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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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때부턴가 당신과 나는 점점 엇박자로 나가기 시작하는군요. 나는 언제나 그렇듯이 자정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드는데 당신의 취침 시각은 점점 빨라지고 있더이다. 문제는 빨리 잠이 드는 만큼 일어나는 시각도 그만큼 빨라지니 새벽녘에 화장실에 간다고 나가 보면 뜬금없이 주방에 환히 불이 켜져 있네요. 새벽 세 시경이면 삼라만상이 잠들어 있는 한밤중인데 이런 시간에 당신은 찬장 안의 그릇을 죄다 꺼내 놓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뿐만이 아니오. 자고 일어나면 신발장 앞에 박스가 보란 듯이 떡하니 나와 있고, 그 박스 안에는 어느 때는 옷가지가 어느 때는 신발들이 어느 때는 당신이 평소에 들고 다니는 가방까지 함부로 박스 안에 던져져 있었지요.

“쓸 만한데 버리는 거야? 버리기엔 좀 아깝지 않아?”

내 딴에는 당신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조심스럽게 나의 생각을 조금 발설했을 뿐인데 기다렸다는 듯이 속사포 같은 당신의 반론이 나를 강타하더이다.

“당신은 이런 게 구질구질하지도 않아? 좀 버려야 새것도 살 것 아냐! 비싼 것도 아닌데…”

감정이 개입된 듯 느껴지는 당신의 예상치 않은 발언에 오히려 당황하는 것은 내 쪽이오. 이제껏 별 말 없이 잘 살아온 당신이 최근 들어 사사건건 왜 날을 세우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나보다 독서를 많이 해 상황에 맞는 세련되고 어려운 단어를 잘 구사하는 당신이, 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내가 뉴스를 보다 뭔가 어법에 맞지 않은 표현을 하면 말꼬리를 물고 늘어져서 나를 피곤하게 만들기 시작했고, 무슨 큰 죄나 지은 사람처럼 당신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는 그런 나 자신에게도 화가 나더이다. 수십 년을 가까이 곁에서 지켜 봐 왔건만 최근에 보이는 당신의 낯선 모습에 나도 점점 혼란스러워지는군요.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이 당신에게는 소중하지 않았던 것일까. 행복하지 않았던 것일까.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걸어온 길을 이탈하지 않고 잘 걸어 왔으면 그걸로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 크게 속 썩이는 아이들도 없었고 남편인 나도 나름대로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차질 없이 수행해 왔다고 자부하는데 당신에게는 지금 와서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미디어마다 열심히 떠들어대는 빈둥지증후군? 정체성 찾기? 사는 게 바빠 갱년기도 모르고 지났다며 큰소리치더니 갱년기를 이제야 맞이하는 건가? 그렇다면 남편인 나는 할 말이 없는 줄 아는지. 아이들은 커갈수록 아버지보다 엄마를 더 좋아하고 당신의 사회적인 인간관계망은 어찌 그리 넓고 다양한지 오히려 나이 들어 느끼는 외로움이나 상실감은 남자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엄습하오. 깊을수록 소리를 내지 않은 강물처럼 남자는 오직 견딜 뿐이지 절대 밖으로 표현하지 않고 있음을 아내들은 왜 모를까요.

당신이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음을 깨우쳐 주고 싶소. 당신과 내가 만들어 가는 생애 중 가장 행복하고 따뜻한 시간만 남아 있다고. 이런 쓸데없는 감정싸움에 시간을 허비하기엔 세월이 너무 아깝다고, 당신이 나를 잘 만났다는 생각보다 내가 당신을 잘 만나서 행복했노라고, 처음 만날 때야 서로 뜻이 맞아서 만났겠지만 이젠 서로 맞추어 가며 살 연륜이 아니냐고, 아름답고 즐거운 추억만 차곡차곡 골라 가슴에 담고 살아간다면 얼마냐 좋겠냐고 말해 주고 싶소. 부부의 날을 맞아 당신에게 처음으로 나의 소회를 밝히는 이유는 단 하나, 코로나로 인해 거리두기가 일상이 되었다고는 하나 당신과 나사이의 거리는 더 멀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은 바로 지금 이 순간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에 펜을 들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