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모 (56)-배신자
녹슨 철모 (56)-배신자
  • 시니어每日
  • 승인 2020.04.20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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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다가오는 모양이다. 가끔 이 계절이면 찾아오던 우울증이 올해 태원에게 다시 나타났다. 그의 우울증은 어떤 해는 건너뛰기도 하였지만 어떤 해는 고통스럽게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정신과 질환이란 그 사람의 성격이나 주위 환경과 밀접하다고도 하고 또는 그런 것 때문에 병이 온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그런 학설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전적으로 그렇게만 정신과 질환이 오는 것만은 아니었다. 당뇨병은 설탕을 많이 먹어서 오는 병이 아니고 인슐린이란 호르몬이 모자라서 나타나는 병이다. 이런 약점이 있는 사람이 설탕을 많이 섭취하면 당뇨병이 잘 오게 되어 있다. 인간의 우울증도 한때 정신분석이 우세하던 시절에는 어린 시절 마음 속에 남겨진 상처가 무의식 속에 숨어있다가 어른이 되어 자극을 받으면 병적으로 나타난다는 학설이 있었다. 그러다가 정신의학이 발달하여 뇌 영상촬영이나 호르몬 분석이 가능해지면서는 우울증이 정신적 이유 외에도 신경호르몬의 불균형으로 저절로도 생긴다는 학설이 생겨났다.

현재는 두 가지를 다 원인으로 보고 있는 실정이다. 즉 우울증이란 어떤 사람은 심리적인 이유가 원인이 되고 또 어떤 이는 타고난 신체적 대사장애로 발병하기도 한다는 것이 현재 내려진 결론이다. 미리 신체적으로 약점이 있는 사람인 경우에는 나쁜 환경, 자극적 환경에 큰 영향을 받게 된다. 전문가가 아닌 사람은 결과만 보고 그 병이 촉발된 사건이 병의 원인인 줄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신이 아닌 이상 어떤 사람에게 비극적인 사건이 생겼을 때 그것이 그 사람의 약한 인성 탓인지 아니면 주위 사람이나 환경이 워낙 나빠서 그런지는 알 수가 없다.

 

태원의 우울증 증상은 우선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잠든다 해도 꿈 투성이며 또 자주 깼다. 예민해졌다. 남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남들의 의미 없는 소리에 쉽게 흥분하곤 했다. 생각의 반추가 계속되기도 하였다. 

태원이 홀로 아파트에 앉았노라면 밤새 이런 고통이 계속되었다. 이제 군단 생활도 편안해지고 주위에서도 자신을 인정해주는데 이게 무슨 꼴인가. 더구나 아들이 생겼다. 여건이 아주 좋아졌다. 그러므로 이런 우울증은 한 번 스쳐가는 마음의 감기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태원은 스스로를 달래고 있었다. 

병주가 아기를 안고 서서 울고 있다. 아기는 뭐라고 옹알이를 하는데, 소리가 확실치 않다. 깨어보니 꿈이다. 다시 잠이 든다. 이번에는 장면이 바뀐다. 선영이 손을 흔들며 하늘로 날아오른다. 표정이 보이질 않아 기뻐하는지 슬퍼하는지 짐작할 수가 없다. 불안하다. 불쾌하다. 캄캄한 방이 무섭다. 이 세상에 혼자라는 뼈아픈 고독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낮에 그 많던 사람들이 이 밤에는 다 어디에 있는 것일까? 가만히 앉아 있어 보았다. 탁자가 움직인다. 시계가 움직인다. 인형이 움직인다. 밤은 물건들의 세상인 모양이다. 내 존재를 무시하고 저희 마음대로 눈치 없이 움직인다. 태원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무서움을 피하고 있었다.

 

유 소위가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밤 근무를 하고 들어가는 길인지 얼굴이 부숭부숭하고 표정이 밝지 않았다. 자신만만하고 항상 웃는 낯이던 그녀가 오늘은 평소와 너무도 달라 보였다.

“과장님, 저와 이야기할 시간이 좀 있으세요?”

그녀가 너무 진지한 듯해 나는 일부러 농담 삼아 크게 대답하였다.

“아무렴, 난 유 소위 같은 미녀라면 하루 종일이라도 좋아요.”

그녀는 웃지 않았다.

"저... 과장님은 군단 의무실장 우 대위님의 선배 되시지요?"

"네. 그렇소만.”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전부 말씀드리고 떠나고 싶어요. 사실 전 우 대위님께 말하고 떠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용기가 생기질 않아서....... 아님 그런 만남이 무섭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저는 마음의 응어리를 그냥 안고 가기엔 너무 짐스러워서.”

나는 이런 말을 듣는 순간 유 소위가 무슨 말을 하려는가 약간 짐작이 갔다. 내가 태원 대신에 들어줘야 할 이야기이며 유 소위가 못 다한 역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고 생각해요. 그래요. 전 태원 씨를 좋아했어요. 아시겠지만 전 남편이 있는 사람이에요. 처음 태원 씨를 만났을 땐 그냥 좋기만 했어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전 태원 씨를 갖고 싶어졌어요. 그렇다고 남편이 싫어진 건 아니고요. 두 사람은 정반대의 사람이지만 둘 다 좋더라고요. 하지만 전 다만 좋아하면 될 줄 알고 또 사람을 좋아하면 행복한 시간이 생기는 줄만 알았죠.”

“최근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나는 짐짓 모르는 척 그런 질문을 해보았다.

"그래요. 제 남편이 우리 사이를 알고 난리를 부렸지요. 처음에는 저도 나를 이해 못하는 남편이 저질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제가 어리석다는 마음이 생기더군요. 남녀의 관계란 그렇게 달라지더군요. 우린 포옹밖에 안 했지만 나중에는 점점 감정이 발전하는 걸 느꼈어요. 그가 원하기만 하면 저는 어떤 요구라도 들어주고 싶어지더라고요. 아니 어떨 땐 제가 그에게 요구하고 싶어지더군요.”

처음에는 울먹거리며 느리게 시작하던 말투가 울음을 그치며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하였다.

"만약 남편에게 제 편지가 들통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갈 때까지 갔을 거고, 그렇게 되었다면 그것으로 모든 게 끝장났을 거예요.”

그녀는 내가 그들 관계의 상당 부분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사건의 전말에 대한 설명도 없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녀는 비록 나를 앞에 두고 있었지만 지금 이 이야기는 태원에게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나 태원 씨는 결국 육체를 탐하는 관계로 변하고 있더라고요. 한때 전 순진하게도 귀찮은 남편을 떠나 태원 씨와 조용히 정말 이상적인 사랑을 계속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와 함께 영천 삼사관 학교로 전출 가겠다는 약속까지 하였죠. 하지만........”

"안 가기로 한 거요?"

“네! 전 가지 않기로 했어요. 제가 오늘 과장님을 찾아뵌 것은 이런 이야기를 차마 태원 씨에게 편지로 쓸 수도 없고 만나서는 더더욱 할 수가 없어 찾아온 거예요.”

부탁을 들어주었으면 하는 표정으로 그녀는 말했다. 처음 주저하던 그녀의 모습은 달라지고 이제는 모든 말을 다하고 속 시원히 떠난다는 표정이었다.

“최근에는 정말 이혼하고 태원 씨와 결혼할 생각까지도 해봤어요. 하지만 그건 공상일 뿐이에요. 사랑은 현실을 무시하고 이루어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의 공상이 실현되면 두 집 모두 박살이 나고 두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게 되겠죠. 전 이 다음 세상에 태어나선 꼭 한 번 태원 씨와 살고 싶어요. 하지만 이승에서는 불가능한 이야기죠. 그러나 태원 씨를 영원히 잊지는 못할 거예요. 과장님, 전 믿어요. 이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이라는 걸요. 과장님의 가슴 속에 영원히 간직하시고 남에게는 말하지 말아주세요. 전 현실과 이상을 결합시킬 수 없었고 누구를 가지려고 하는 저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어진 겁니다.”

이야기 도중 그녀는 말을 잠시 끌었다.

"저는 실장님과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깨고 떠납니다."

이야기 후반에서는 다시 그녀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했다. 그런 모습을 보자 나의 가슴에도 눈물이 고였다. 아침 진료실에서 다른 환자들도 보고 일과를 시작해야 했기에 나는 이야기를 어느 정도에서 끝내려고 하였다.

"근데 어디로 가는 거요?”

그녀는 한참 망설이더니 마지못해 대답했다.

“59후송병원으로 신청해뒀어요.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씀은 말아주세요.”

그녀는 덜 마른 눈을 손으로 가리고는 진료실을 나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