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모 (51)-유 소위 남편
녹슨 철모 (51)-유 소위 남편
  • 시니어每日
  • 승인 2020.03.16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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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진료실에 간호과장이 방문하였다. 같은 동료에게 놀러 왔다고 하지 않고 방문하였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내가 아직 군인이 된 지 1년도 안 된 초보 장교인 것도 이유지만 그날 그녀가 찾아온 것은 정말 예사 방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과장님, 혹시 소문 들으셨어요?"

“무슨 소문요?"

"어젯밤에 우리 병원에서 난리가 났었어요.”

“그게 무슨 소리요?"

“어젯밤 유 소위 남편이 병원에 왔거든요. 아마 유 소위가 밤 근무인 걸 알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요?"

나는 뭔가 가슴이 울렁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면서 그녀의 말을 재촉하였다.

“유 소위 남편 박 중위는 현재 G.P 근무를 하고 있잖아요. 육사 나오고 또 휴전선 내의 근무도 자청해서 들어가 앞으로 장군감이라고 우리 군단에서도 소문이 난 사람이에요.”

그럼 그런 전도유망한 엘리트 장교가 왜 야전병원에서 난리를 쳤단 말인가? 간호과장은 마치 나의 속마음을 안다는 듯이 다음 말을 이어갔다.

"편지를 봤다는 거예요.”

“편지라뇨?” 

반문하긴 했지만 간호과장이 일부러 나에게 와서 편지 운운하는 것은 바로 태원이가 관계된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모른 체하고 듣고 있었다.

"선영이가 밤번하면서 시간이 나니까 그동안 자기네들이 주고받았던 편지를 정리하고 있었던 거죠. 이때 육본에 출장 갔던 남편 박 중위가 전방에 들어가다 일부러 병원에 들렀던 거죠. 마누라 얼굴이나 한번 보려고요. 그런데 마누라 얼굴과 함께 외간 남자의 편지도 보게 된 거죠."

"그래서 어떻게 되었소?"

"물론 그 사람도 체면이 있으니까 우리 직원들에게 행패를 부리거나 기물에 손을 대지는 않았죠. 하지만 밤중에 군단 아파트에 가자며 그의 아내를 잡아끌고 가려고 했지요. 제가 마침 당직이어서 그 광경을 보고 만류해서 그런 일은 없었지만, 내일 당장 군단 감찰부에 보고해서 우 대위님을 징계받게 하겠다고 하며 떠났죠.”

나는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나는 시골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머리 하나는 똑똑하나 돈이 없는 젊은이들이 들어가는 곳이 육군사관학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유 소위 남편인 박 중위 역시 그런 부류였다. 물론 그들의 목표는 참모총장이나 최소한 별 단 장군이겠지. 

보통 육사를 나오면 중령, 대령까지는 쉽게 올라간다. 물론 그들의 자질이 다른 출신 장교보다 뛰어난 것이 있어야 하고, 또 그들의 선배들이 전군을 장악하고 있으니 그 정도는 크게 어려울 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중령이나 대령에서 장군으로 진급을 못하고 일반 사회에 나오면 완전한 반 거충이가 되고 만다. 그들의 군대 경력이 그렇게 많지 않으니 연금으로 생활하기도 어렵다. 게다가 나이가 든 탓에 그들의 주특기로는 어디 취직자리도 잡기 쉽지 않다. 차라리 중위나 소위 때 쫓겨나면 새 기술을 익혀 사회 적응이 가능한데 영관급이 되어 나가게 되면 죽도 밥도 안 되는 터였다. 나는 나의 친구들과 또 환자들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나름대로 육사 출신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오직 진급과 가족에게 몰두하고 있는 직업군인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무척 답답하였다.

 

문학이니 음악이니 하는 것들은 보병에게는 두드러기 나는 말들이다. 반면 여자들은 군대 이야기에 진저리를 친다. 이런 점에서 간호 장교들은 보병 장교보다 군의관에게 호감을 갖는 경우가 많았다. 군의관들은 대개 집안이 잘사는 편이고 사고의 틀도 보병보다는 넉넉한 느낌을 주므로 그녀들이 호감을 갖는 경우가 많은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태원은 학교 다닐 때 자신도 뭐 그리 잘나거나 뛰어난 인물도 아니면서 괜히 남들을 깔보고 자신을 굳이 아웃사이더인 것처럼 행동했다. 특히 여자들에게는 그 정도가 멸시에 가까웠다. 인간이 무슨 일이든 ‘너무’라는 말이 붙은 행동을 할 때는 그 행동의 동기가 순수하지 않거나 단순한 이유가 아닌 경우가 많다. 

나는 태원을 정신분석까지 해본 적은 없지만 그의 이중적인 사고에 대해서는 조금 생각을 해보았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까지는 지각도 한번 없었으면서도 대학에 와서는 지각이나 결석을 너무 많이 하여 그의 아버지가 학교에 불려 올 정도였다. 대학 다닐 때는 군사독재를 무너뜨려야 된다며 학교까지 잘 다니지 않았다. 그러나 전방에 가서는 뛰어난 군인으로 적응하였다. 인간은 누구나 양면성을 갖고 있다. 여성은 속에 남성적인 면이 숨어 있고, 남성 역시 속에는 여성적인 면이 함께 존재한다. 그들 내부에 함께 존재하는 상반된 자질 때문에 전혀 다른 종의 남녀가 함께 살 수 있는 밑천이 되는 것이 아닐까?

태원의 이중성은 아무리 인간의 본질이라고는 해도 양자의 차이가 너무 뚜렷하므로 이것은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나아가서 일종의 병적인 것으로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가 여성을 비하한다는 것은 반동형성일 것이다. 왜 내가 이런 정신분석 용어를 그에게 붙일 수 있냐면 그가 오랜동안 나를 만나면서 자주 그런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의과대학교도 그의 고향에서 다녔으면 등 따습고 배부르게 다녔을 것인데 굳이 서울로 온 이유를 그는 아버지가 보기 싫다는 데서 찾았다. 그는 어릴 때 누나가 있었으면 하는 소망이 깊었다고 한다. 항상 공장 일에 바쁜 어머니와 아버지만 있고 자신은 장남이라 그를 돌보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있긴 했다. 그 집에는 식모가 둘 있었다. 태원은 식모는 일하는 사람일 뿐이지 정을 주고받는 그런 존재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자랐으므로 그녀들은 음식과 옷을 제공해주는 기능적인 존재일 뿐이었다. 그의 여성 혐오증은 바로 여성에 대한 어리광의 반대로 드러난 감정 증상이요, 사랑받고자 하나 거부당한 데 대한 지독한 원망의 결과였을 것으로 나는 진단하였다.

 

선영이 태원에게 먼저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이런 경우는 거의 없었으므로 한편으로는 무척 기쁜 마음이 들면서도 뭔가 불길한 일, 기분 나쁜 일이 생긴 듯하여 그의 가슴은 이상하게 납덩이처럼 무거운 느낌이 들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가 말을 꺼냈다.

“우리 이제 그만 만나요.” 

그녀는 무척 침착한 어투로 말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농담인가, 뭔가 삐쳐서 하는 소린가 해서였다.

"남편이 모든 걸 다 알아버렸어요." 

태원은 선영의 말을 애써 무시하고 싶었다. 올 것이 왔다고 생각은 했지만.

"무얼 알았다는 거야? 우리가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태원은 선영의 말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선영의 다음 말이 태원을 긴장시켜 입술을 바싹 타들어 가게 하였다.

"그럼, 우린 아무 관계도 없는 남이야! 당신은 남자고 난 여자고...그것도 난 결혼한 유부녀라고, 그걸 한동안 잊고 있었던 거지. 난 누구에게도 상처 주기 싫어. 당신도 마찬가지겠지.” 

선영의 이 싸늘한 한마디 한마디가 태원의 가슴에 비수로 꽂혔다. ‘언제 우리가 이 사실을 부정한 적이 있었던가.’ 태원이 선영에게 추구한 그동안의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남들이 이러쿵저러쿵 우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참을 수 있어. 하지만 남편의 한마디 한마디는 현실이야. 어젯밤 우리는 모처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 처음에는 남편이 하도 흥분해 날뛰는 바람에 내가 먼저 이혼하자고 했어. 나의 이 한마디에 남편은 조용해지고 말았어.” 

태원은 선영의 남편 얘기에 심한 질투심을 느꼈다. 비록 그들이 이혼하길 바라진 않았지만 너무 쉽게 끝난 부부싸움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난 두 번 다시 태원씨를 안 만나겠다고, 그리고 편지하지 않겠다고 남편에게 맹세했어.”

태원은 선영의 말에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태원의 표정은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절망감을 다 담고 있었다. 선영은 한때 태원의 그런 표정까지도 사랑하고 있었다.

"그럼 이제 우리 전출문제는 어떻게 해요?" 

이 말을 듣자 태원은 정말 혼란스러웠다.

이제 관계를 그만 두자는 이야기를 하고서는 또 전출문제라니? 전출은 같이 가는 것인데 그러면 다시 관계를 이어가자는 이야기인가? 그로서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녀는 평소에도 이야기의 진행 방법이 그랬다. 이런 것이 여성 특유의 대화 방식인지 아니면 선영 특유의 표현 방법인지 태원은 그럴 적마다 당황하고 이해가 어려웠다. 태원은 더 이상 말할 기분이 나지 않아 아무 말 없이 자리를 일어섰다.

   별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둘이 대판 싸웠다면 그녀의 남편이 태원과 선영이 같이 전출가게 두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도 같이 가겠다는 것이 진정이라면 하고 생각하니 태원의 가슴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아직도 둘의 전출 계획은 모르고 있을 것이다. 나중에 결국 알게 될 것인데 그렇다면 선영은 어떤 난관이라도 태원과 함께 하겠다는 뜻일까? 아무튼 그녀의 진정한 마음을 읽을 수가 없다. 

빈방에 돌아오니 아내 없는 방이 너무나 휑하게 느껴지고 그날 따라 소위들도 놀러 오지 않았다. 일을 간단히 결정해버리는 태원의 성격으로는 정말 답답한 일이다. 상대방의 의중이 잘 파악되지 않는 탓이었다. 가령 태원의 평소 성격대로라면 선영을 강제로라도 3사관 학교로 데리고 갈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는 남편이라는 또 하나의 변수가 있으므로 그는 마음을 결정짓지 못하고 있었다.